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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153 西窓 방의 추억으로 보내는 獻詞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153 西窓 방의 추억으로 보내는 獻詞

SHADHA 2004. 2. 14.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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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샘




西窓 방의 추억으로 보내는 獻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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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플러 나무 위에 매달린 스피커가 쏟아내던 음악도 끊기고 교정에 적요가 잦아드는
가을 날 오후시간이면 내 몸은 어느 새 푸른 물빛에 젖어 가볍게 일렁이는 것을 느낀다.
남청색 어둠이 창밖에 짙은 커튼을 드리우기 전,
잠시 수런대던 사위가 아득한 침묵 속에 빠지면서 하루가 신비한 푸른빛으로 젖어드는 순간이다.


나는 그 푸른빛이 물병 속을 채우듯 가득 차는 것 같은 방 하나를 가진 적이 있다.
당시는 여름날의 폭염이 극도의 기세로 내리꽂히며 알 수 없는 곳을 향한
최강의 분노와 실패감을 느끼게 하던 날들이었다.
난생 처음 당해본 그러나 생애 다시는 이런 방식은 없다를 절감하게 하던
제비뽑기라는 운명적 선택의 방법이 그 방과 나를 맺어준 인연이었다.
세 평도 못되는 방은 타이트하기가 코르셋 속 같아서
가끔은 환기를 위해 출입문을 열고 심호흡을 해야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가을이 짙어지면서 더위가 사라진 西窓의 햇살은
부드럽고 천진한 강아지풀처럼 다가와 뒷목을 간지럽혔다.
문득 영혼까지 따스해지는 그 감촉에 고개를 들면 서향의 작은 창 가득
황금 오렌지빛 수건을 두른 듯 하늘은 아름다운 노을을 입고있었다.
짧은 탄성을 지르며 내려다보면 금새 하늘에 돋아나는 별처럼
지상의 불빛들이 점등되고 루비보다 화려한 자동차의 미등들이
꼬리를 물고 흘러가는 것이 보석 목걸이처럼 아름답다.
참으로 살아있다는 존재감과
흘러가는 것의 율동감으로 작은 희열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그렇게 잠시 온몸으로 느껴지던 행복은 저물녘 서창 방의 푸른빛과 함께 각인되었다.
저 먼 곳에 둘러선 산등성이에도 희미하고 낡은 가로등이 하나 둘 점등된다.
유달산이 보랏빛으로 장엄하게 둘러선 곳, 스카이라인을 따라 불 밝힌 산기슭을 본다.
유난히 푸른 하늘빛을 되쏘는 저 산 너머엔 押海 바다가 있다.
지는 해를 삼키고 더운 해를 식히고 지친 해를 씻겨주는 푸른 바다가 있다.
노을은 귀로의 갈매기들과 함께 푸른 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그래서 아름답고 눈부시고 장엄하게 부서진다.


지는 해를 혼자서 바라보는 일은 참 많이 쓸쓸하다.
마음의 풍경 또한 쓸쓸해지는 탓이다.
그러나 노을에는 향기가 있다. 오래도록 남는 잔향이 있다.
허망한 사랑이 끝난 후의 진한 아쉬움의 향기 같은 것이다.
노을의 뒷모습은 경건한 기도처럼, 사위가 작은 춤처럼 은근하다.
그래서 한없이 우아하고 외롭다. 그 외로움의 겨드랑이로
산동네의 불빛과 낙조의 풍경은 항상 심호흡처럼 마음의 숨을 틔워주었다.


지금도 잠시 그 방에서 보던 일몰의 시간을 회상하는데 마음은 고즈넉하고 수수롭다.
뜻밖의 불운했던 방이 내 일생 유일한 기쁨의 處所가 되어준 것이다.
잠시 머물었던 곳이기에, 한 번 망실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에
이토록 간절하고 향기롭게 여겨지는 것 일가?
항상 가슴속에 따스한 노을의 풍경과 신비한 鴉靑색의 어둠이 스며들어
투명한 영혼이 되는 시간을 깨닫게 한 것이다.
그것은 한 때 절친했으나 이제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지나간 사랑처럼
거기 오롯이 추억이 되어 남아있다.
그리운 곳이자 그리운 시간이 되었다.


지금도 나는 그곳에서 쓰던 푸른 물병들에 물을 담아두었다가
해거름 홀로 마시는 저녁차 한 잔을 만든다.
투박한 백자 다완에 곱디고운 엽록체의 가루를 고운 대나무 다선으로 정성껏 휘저어서.
저 이탈리안 카푸치노 커피를 닮은 沫茶 한 잔을 만든다.
하얀 泡沫이 풍성하게 일궈진 차는 연록과 진록의 물색을 닮아 바다처럼 고요하다.
저녁 노을을 완상하며 마시는 차는 이윽고 초록빛 바닷물을 마신 듯 내장을 채우고 일렁인다.
그곳에서 살던 한 생명체가 한 마리 푸른 물고기처럼
눈알도 비늘도 그리고 뇌와 내장과 혈관조차 푸르게 물드는 열대의 어족이 되어서
푸른 물 속을 유영하며 푸른 꿈을 꾸는 환상을 갖게 한다.


그러나 어둠이 내리기 전에 서둘러 그 방을 떠나야 한다.
등대처럼 홀로 불 밝히는 외로운 꼭대기 방에 엄습하는 공포나 통증을
견딜 수 있을만한 강심장은 아니기에...
그 방은 지금 한 어리석은 자의 배신을 품은 듯
잿빛 먼지와 곰팡이와 눅눅한 부패의 냄새로 버려져 있다.
다시는 저를 사랑하고 청소해줄 애틋한 주인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남겨둔 내 시간과 푸른 영혼의 편린을 애달파하는 처소가 되었다.
하여 하염없는 그리움으로 가슴의 훈김을 뽑아내어
소박한 풀꽃다발을 엮듯 작은 헌사를 지어 감히 그 곳에 띄운다.



2003.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