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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152 상추 모종하는 날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152 상추 모종하는 날

SHADHA 2004. 2. 14. 17:35


푸른샘




10/12 <상추 모종하는 날>

10/14






 

10/12 <상추 모종하는 날>


토요일은 출장 후 휴가라고 쉬는 이의 뜻대로 주말 스케줄을 잡았다. 가까운 톱머리 해수욕장의 낙지축제로 해서 홀통유원지의 윈드써핑을 구경갈까하다가 결국은 광주 주변 산야를 어슬렁거리다가 내걸린 현수막을 보고 노안에서 열리는 배따기 행사를 구경갔다. 행사는 오후 2시부터라 배따기 체험은 못하고 냉동창고에 보관된 배 두 상자를 사고 墓자리로 쓸 산자락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한시에 수업을 끝내고 나오는 아들을 태우고 무얼 먹을까로 한참 논쟁을 벌였다. 아비는 항상 오랜만에 만난 아들에게 갈비를 먹이고싶어하고 아들은 한끼 식사보다는 용돈이 넉넉하길 원한다. 어미는 챙겨간 반찬으로 집에서 차려먹고 가벼운 등산을 하자고 했다. 결국은 증심사 오르는 길에 보리밥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천 원씩하는 보리밥이나 자연산 추어탕은 정말 맛도 좋고 푸짐하다. 그는 추어탕 맛이 맘에 들어선지 금방 꺼지고 마는 보리밥 먹은 아들에 대한 연민을 거둔다.


아들은 조모임 축구하러 가겠다고 벗어나려 해서 헤어지고 우리는 시어머니의 친정, 진외가에 갔다. 명절 외엔 항상 바쁜 농촌의 모습은 한가한 나들이를 무색케 한다. 잠시 딸기하우스에 비닐 씌우던 손길을 쉬고 가져간 배를 깎아먹으며 이종 사촌간 동서는 '하우스 커피'를 타준다. 맥스웰 하우스의 유래와는 거리가 먼 노동의 고단을 풀어주는 진한 커피는 바로 남대문 시장에서 맛보는 밥수저로 푹푹 저어주던 그런 걸쭉함이다.


동서는 건축상에게 빌려주기로 오늘 계약했다는 밭에서 뻑뻑하게 난 갓이랑 열무를 솎아준다. 한쪽으로 쏠린 상추 모종을 솎아서 양념장에 밥 비벼먹으면 맛있다고 맘껏 솎으라 한다. 나는 남의 밭이라 조심스러워서 살살 골라 뽑았다. 이렇게 연한 싹을 키워낸 보드랍고 기름진 밭이 이제는 건축 자재를 쌓아두면 거칠고 메마른 땅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밭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주유소로 바뀐 내가 소유했던 유일한 땅도 시멘트 콘크리트에 덮여서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이 되었다. 그 밭에 쌓아두었던 스무 자루 너머의 양파도 어느 날 아침 포크레인 흙더미 속에 매몰되었다. 마늘씨 꽂을 때 쓰려고 새로 산 26구멍 검정 비닐도 한 두루마리가 고스란히 묻혔고, 호미 세 자루와 삽 두 자루 그리고 고랑 치는 당그래와 쇠스랑도 나의 농경시대와 함께 매장되었다. 약통과 고무장화와 몇 가지 비료와 씨앗이 든 도라무깡, 그리고 물통들과 물뿌리게도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맛보던 고요와 한가와 한없이 자연과 친화하던 무념무상의 시간들이 사라졌다. 감나무 가지에 날아와 울어주던 산새 소리와 깻대나 콩대를 태우면 하늘로 오르던 푸른빛 연기와 향기의 사무치던 감상이 어디론가 날아 가버렸다. 한없이 되작거리며 벗어날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타오르던 연모의 불이 한 줌 미련없이 피지직 꺼져버린 것도 내가 밭을 잃은 후이다.


나뭇잎들은 가장자리부터 슬쩍 노란 물로 브릿지를 하였나? 가로수들이 가을빛으로 채비하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며 돌아왔다. 갓은 얼마 전에 담근 것이 있어서 형님 드리고 열무는 다듬어서 풋고추 갈아서 찹쌀풀에 물김치를 담구었다. 상추는 비빔밥으로 하다가 다른 야채들과 섞어서 식초와 올리브유를 뿌려서 샐러드를 만들어 두끼나 먹고도 남았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를 준비하는 바람이 후덥지근한 주일 오후, 기아팀은 인천구장까지 가서도 호되게 당하고 있다. 그는 볼 것 없다해도 통을 파듯 티비를 지키고 앉아있다. 나는 남아서 물을 적셔둔 상추 다라이를 들고 아파트 뒤란으로 간다. 우리 아이들 어려서 그리도 재미나게 놀던 놀이터가 이젠 그네나 미끄럼틀도 다 파내고 그저 차 몇 대 더 두는 주차장이 되었다. 농구대 하나 매달라고 하도 졸라서 장대를 세우고 쓰레기통을 밑 뚫어서 세워주던 자리만 내 눈엔 확연히 남아있다.


차가 닿지 않는 곳엔 조금씩 갓이나 배추를 갈아논 사람이 있다. 나도 그 부근에 한 자락을 화분갈이 할 때나 쓰던 꽃삽으로 모래와 연탄재 혼합 같은 퍽퍽한 땅을 판다. 퇴직한 방송국 국장댁이 지나다가 호미를 들고 내려온다. 함께 나누어서 상추 모종을 심는다. 드디어 내 상추밭이 가로 120센티 세로 90센티 정도의 책상 크기로 만들어졌다. 그 댁은 고추모 두 개 심었던 자리와 가지모 두 개 심었던 자리가 있어서 내 터의 두 배쯤 된다.


저녁부터 여기도 비가 온다고 예보했고 티비에서 야구 중개하는 인천, 중부지방은 벌써 폭우가 퍼붓고 있었다. 물주는 일은 하늘에 맡기자고 손을 털고 헤어졌는데 조금 후 시장 다녀와서 차를 주차하며 보니까 그 댁 모종들은 벌써 물 한 바가지에 목을 축였다. 난 지난 여름 지긋지긋한 비도 싫고 또 이번 비 후에 성큼 다가올 가을이 춥기는 하지만 갓 옮긴 모종들을 위해서 비가 오기를 빌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낮고 어둡고 두꺼운 하늘이다.


저녁을 지어먹고 저녁예배 가는 길 차 앞유리에 빗방울이 듣는다. 조금씩 느리게...  그러다가 서서히 알레그로... 알레그로 콘브리오로 두드려대기 시작한다. 빗소리가 상쾌하다. 이리 상추 싹들 때문에 내 마음이 경도되는 것을 바라보다가 문득 쓸쓸해진다. 상추 싹이나 갓 꽂아 티운 마늘 싹에는 기뻐하지만 내 마음 밭의 새순은 다시 돋지 않을 것이란 망연함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은 없다. 平常心이니 恒常心이니 혹은 不惑이니하고 마음잡기에 노심초사할 때는 언제였나 이제는 절절하거나 연연하거나 도무지 미동않는 마음 때문에 서럽다. 그대신 사소한 날이나 가시를 만나면 분노나 적개심으로 금방 부글부글 비등점을 넘쳐 오르니 도무지 완충의 여지가 없는 얄팍한 노파의 심사에 또 한 번 서럽다. 그러나 이제 잠시잠시 오가며 저 책상 하나 넓이만한 내 상추밭에 눈길을 던지며 마음을 갈아보자. 촉촉하고 보드랍게...


2003.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