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샘
11/18 내 아들의 생일에...
11/18
시온아... 오늘은 네 생일이다. 그래선지 새벽에 알람 소리로 잠이 깨면서부터 내내 네 생각이다. 어둠 속을 달려가서 새벽기도를 하면서도 내게 쌓인 많은 문제를 젖혀두고 그저 네가 태어나던 날의 기억만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오랜 진통과 유도 분만의 산통을 견디려 들어간 분만실 앞에 서서 내가 벗어두고 간 신발이 마음 아파 울었다던 친정 어머니, 그리고 드디어 네가 태어나던 시간, 건너 편 벽에 걸린 까만 태두리의 원형 시계는 정오를 30분 지나있었지. 첫잠을 달게 자고 난 후 깨었을 때 정장에 코트까지 차려입으시고 하얀 예식용 장갑을 낀 채 단장에 몸을 기대고 내 얼굴을 측은히 들여다보시던 우리 아버지의 얼굴이 지금도 만져질 듯 가깝게 느껴진다.
그래, 네가 태어나고 오늘로 만 24년이 되었다. 내가 스물 여덟 나던 가을이니 너는 이제 거의 내 생의 반절을 쫓아온 셈이다. 그동안 나는 부모를 여의었고 너와 네 동생을 낳아 기르며 서서히 늙어왔다. 나도 내 어머니가 스물 여덟이던 해에 태어났었다. 그리고 마흔 일곱 해를 어머니 가까이서 살았다. 그러나 얼마나 어머니를 알고 이해하며 살았는지는 정말 자신이 없다. 너도 아마 그럴 것이다. 네가 살과 피를 찢어 나눠준 어미를 어찌 다 알고 사랑할 수 있겠냐? 나는 지금도 너만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네가 당하던 좌절의 시간들이 가슴을 할퀴는데...
그러나 이제 너는 당당하다. 어떤 어미의 투정도 다 받아주고 다독이며 녹아질 때까지 기다려주고 따뜻이 어루만지는 너는 나보다도 어른이다. 오늘도 당장 네가 있는 곳까지 쫓아가서 너의 동무들이랑 조원들에게 푸짐하게 저녁을 사주고싶어하는 철부지 어미의 뜻을 너는 완곡히 거절했다. 아마도 부모를 잃은 친구나 형편이 어려운 조원이 너를 부러워하다가 마음 아파할까 봐 그런다는 걸 나도 눈치 챌 수 있었다. 열흘 전 함께 뮤지컬 캣츠를 보며 듣던 노래 <메모리>를 기억한다. 행복했던 시간을 추억하며 또 새로운 내일을 기다리는 것이 유일하게 천상으로 선택받아 올라가는 고양이의 노래였다.
그 날 8일은 주말이기도 했지만 수능시험이 끝나고 많은 수험생들이 어머니의 손에 끌려 온 듯 했다. 우리 곁에도 아버지랑 아들이 있었고 여기저기 어머니와 함께 온 아들, 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네가 고딩을 마치던 당시에 우린 그들처럼 여유롭지 못했고 너무나 초조했었지. 하루 하루가 기다림으로 무너지는 느낌이었던 날들이 몹시 쓰라렸다. 그러나 네가 예약하고 권유해서 우리 둘이서 보기로 한 그 뮤지컬 공연장, 빗속에 한 우산을 쓰고 찾아가며 나누던 이런저런 이야기는 이제 우리가 인생에서 쟁취하려던 과도한 욕심을 버렸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니었을까?
내 아들 시온아... 이제 네 이름은 나의 다른 이름이 되고 말았다. 네 아버지는 그 이름으로 너를 부르듯 나를 부르고 나를 부르듯 너를 부른다. 네 이름을 부르며 느끼는 이 따스한 온기를 나는 참으로 소중하고 기쁘게 여긴다. 나는 그렇듯 네 인생도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빈다. 뜻밖의 감당하기 벅찬 행운 같은 것은 바라지 않는다. 그저 수수하고 담백하게 그러나 한없는 기쁨이 촉촉이 너를 적시는 그런 시간들로 채워지길 바란다. 그런 삶은 거의 네 책임을 통해 소유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으로서, 한 남자로서, 자신과 남을 위한 책무를 다할 때 부끄러움 없는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요즘 나는 생각한다.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말이다.
오늘밤도 잘 자라. 어미의 무릎 위에서 느끼던 가벼운 흔들림도 가슴 내음도 없는 곳이지만 아직 우린 가까이 있다. 서로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기도로 소통할 수 있는 곳,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내 기도는 끝없이 너를 덮고 너를 쓸고 불어서 너울 안에 담아 둘 것이다. 너를 내게 맡긴 하나님의 얼굴이 항상 너를 향하고 밝은 빛을 비추어 너로 더욱 성장하게 하시고 열매 맺어 향기나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대로를 걸으며 더욱 당당하거라.
2003.11.18 너를 사랑하는 너의 후원자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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