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샘
12/7(일) 첫눈 오는 날.
12/08
12/7(일) 첫눈 오는 날, 호미를 사다.
어제 노안과 광주, 무등산 아래로 한 행보하고 돌아오는 길에 헬스까지 한 뒤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했다. 잠결에 그저 밝지 못한 희뿌움한 커튼 밖 창문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느꼈을 뿐이다. 늦게 서야 거실 커튼을 걷고 베란다에 나서니 그제야 우윳빛 유리처럼 뽀얀 창으로 스치듯 내리는 멍울들... 아, 오늘이 大雪이라더니 첫눈이 오는구나. 눈은 희미한 자취처럼 그저 지나는 길에 손 내미는 흔적처럼 살며시 유리에 붙었다가 사라졌다. 누군가에게 첫눈 소식을 알리기 전에 단순하게도 첫눈이 올 때까지 남아있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봉숭아 꽃물이 아직 손톱 끝에 매달려있다는 것에 잠시 행복했다.
그는 찬바람이 든다고 어서 문 닫으라 성화지만 제법 소담하게 내리는 첫눈은 볼만하다. 큰애에게 어서 일어나서 교회에 가고 옷 따뜻이 입고 나가라고 전화를 넣었다. 그런데 왠걸 거긴 화창하단다. 아마도 어제 예보대로 서남해안 쪽으로만 첫눈이 오는 모양이다. 재활용 쓰레기를 버린다고 핑계를 대고 현관 바깥으로 나왔다. 제법 칼바람이 불어 치며 뺨에다 눈송이를 붙여준다. 차가운 감촉도 잠시이고 눈은 가벼운 물방울이 되어 흘러내린다. 눈물이다.
집을 나서니 첫눈이라면서 제법 겁이 나게 휘몰아 내린다. 길가의 가로수나 건너편 언덕의 전나무 같은 침엽수 위에 눈이 쌓이자 금새 크리스마스 트리같이 아름답다. 힘없이 시든 풀 위로 집들의 지붕위로 눈은 금새 솜이불처럼 포근히 덮인다. 오후엔 지난 가을에 가보았던 너른 나주 평야를 낀 몽탄과 몽탄대교를 보러가자 했다. 아마도 그 너른 들판에 눈이 덮이면 시베리아 평원처럼 장엄할 것이다. 그리고 대교 위에서 보는 영산강 지류인 몽탄(꿈여울)의 물줄기는 꿈처럼 아름다울 것이다.
사람은 때때로 물처럼 흘러서 큰 바다에 도달하는 끝없는 자유를 꿈꾼다. 그러나 자유처럼 행복하면서도 한편으로 쓸쓸한 것은 없을 것이다. 고인 샘물이 샘을 떠나 지표를 적시고 개울을 지나서 강물에 이르고 드디어 대망의 바다에 닿을 때까지 물은 스스로 택한 자유와 함께 고적함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상당한 기대감이 아니라면 어설피 샘을 떠나는 것은 그저 깊은 고독과 맞싸우는 일일뿐이다.
도심을 벗어난 차는 신작로 길가에 늘어선 골프 연습장과 무슨 가든들을 스치며 달린다. 그새 눈발은 깨끗이 그치고 빵긋 웃어주는 햇살에 쌓인 눈들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햇볕의 힘은 그리도 대단하다. 雪原을 보자고 떠난 마음까지도 초겨울의 햇살아래 포근해진다. 여기저기 겉잎만 흩어진 배추밭은 김장거리는 어디론가 떠나고 나머지는 노끈에 허리를 묶여서 월동을 기다리거나 경운기로 갈아엎어졌다. 마른 논 위에도 지심을 돋우기 위해 찰지고 까만 부식토들이 수북히 쌓여있다. 더 추워지기 전에 해야하는 일들로 시골 풍경도 바쁘다.
일로(一老) 지나자 급커브 아스팔트 위엔 친절하게도 <연꽃> 이란 하얀 페인트 글씨가 이어진다. 그 길만 따라 쭉 가면 십 만평 연꽃 방죽인 회산지에 다다른다. 회산지는 지난 가을 그리 푸르고 너른 연잎으로 가득 차서 발 빠질 틈도 없이 뻑뻑하던 못이 버쩍 마르고 시든 이파리로 스산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사이사이에 둥우리를 튼 왜가리와 청둥오리들의 입질로 생명력 있어 보인다. 무얼 잡아먹고 사는지 궁금했다. 연꽃 이파리 사이로 낸 보트 다니던 길에선 농병아리 떼들이 종종거리며 단거리 달리기 경주를 하는 듯하다.
나주 평야 넓은 들판은 경지 정리가 잘 되어서 바둑판처럼 질서 정연한데 이곳에서 농사를 많이 하는 사람은 수 백마지기씩 벼농사를 짓는다한다. 아마 穀數를 주고 묵갈림을 한 것이겠지만 대단한 규모다. 몽탄 대교에 다다르니 과연 그 너른 평야에 대는 젖줄답게 수량이 풍부한 몽탄강은 범람할 듯 넘실거린다. 천천히 반월형 구름다리모양의 대교를 건너며 바람을 맞는다. 영산강 지류인 이 강물은 대교 아래서 수량이 늘어나며 살진 가물치 배처럼 잔득 부풀어올라 햇살에 물비늘을 반짝거리며 거대한 물고기처럼 꿈틀거린다.
용당으로 건너는 나룻배 타는 곳에서 차를 세웠다. 얼마 전가지도 거룻배가 다니던 곳이라서 선착장 같은 곳엔 주막도 있고 슈퍼도 있다. 작업장 겸한 비닐 하우스 안에서 김장거리를 다듬고 있는 동네 아낙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일 간 절일 것이라며 맛나게 생긴 작고 알진 배추를 반으로 쪼개고 있다. 포기에 800원씩에 샀단다. 아들과 동생들 김장까지 한꺼번에 한단다. 둘레미경노당 부근 지날 때 백발처럼 눈부신 은빛 억새는 아직도 실팍한 솜털 채를 흔들며 바람을 희롱하고 있다. 여기 저기 파랗게 자라는 마늘순이랑 보리싹은 쏟아지는 햇살로 풀밭처럼 푸르고 화사하다.
동강 농협 있는 곳 삼거리에서 砂浦가는 길을 물으러 멈춘 김에 철물점에 들어가서 호미 한 자루를 샀다. 어릴 적엔 학용품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한창 때까지도 가는 곳마다 필기구를 사곤 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는 여행지에서 반찬거리랑 특산물을 사게되었고 밭을 한 후로는 시골 장을 만나면 대장간에서 나온 호미를 사곤 했다. 그런데 갖고있던 호미는 봄 되면 녹으며 자루가 빠지고 낡기도 했지만 몽땅 밭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내 밭을 산 임자가 말없이 어느 날 새벽에 포크레인을 동원하는 바람에 미처 치우지 못한 양파 20망이랑 함께 매몰된 것이다.
가끔 고추밭에 탄저병 약을 치던 약통이랑 장화와 당그레같은 갈퀴, 삽 두 자루와 호미 네 자루, 그리고 파란 나일론으로 된 덕석과 15구멍짜리 검정 비닐 한 통을 통째로 매장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 뿐이겠는가. 한없이 고르고 쓰다듬던 고운 흙과 내 마음을 고스란히 함께 묻어버렸는데... 그런데 요즘 와서 잠시잠시 그 시절을 그리다가 드디어는 새 연장을 하나 장만할 마음까지 먹게 된 것이다. 호미는 얼굴 면이 넓은 걸로 골랐지만 끝은 아주 예리하고 날선 것이 푸른 물고기 등지느러미처럼 빛난다.
도시의 철물점에선 공장에서 일괄 만든 제품이 4.5천 원씩 하는데 이곳에선 수제로 날을 갈고 꽁지를 마무리한 것이 단돈 이천 원이란다. 그래도 나는 하나만 샀다. 괜한 욕심으로 연장을 여럿 사기 시작하면 결국은 감당할 수 없이 일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저 뒤란 놀이터 곁에 감자 싹이나 심고 비닐을 쳐두었다가 나중에 순을 끊어 심고 하얀색이나 자주색인 감자꽃이나 감상하면 된다. 큰애 집에서 가져온 싹튼 감자는 자줏빛으로 솔라닌독성이 퍼져 오르는 것이 아마도 자주색 꽃을 피울 것 같다.
사포 다리 건너서 학교를 거쳐 돌아오는 길은 이른 어스름으로 남청색 들판이다. 낮고 잔잔한 산허리는 여러 겹으로 둘러친 돌담처럼 들판을 감싸고 둘러서 있다. 너른 들판 위로는 떠도는 구름도 풍성하다. 일찍 떠오르는 하얀 달은 보름을 앞두고 터질 듯 가득하다. 또 그렇게 지나가는 하루의 끝은 마음의 창 앞에다 안식의 푸르고 검은 커튼을 드리운다.
2003.12.8
푸른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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