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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자성대와 영가대 본문

靑魚回鄕(부산)

자성대와 영가대

SHADHA 2006. 9. 10. 17:37

 




자성대와 영가대

子城臺, 永嘉臺







지난 일요일
나는 초등학교 5,6학년 시절로 돌아가 보았다.

그 시절 나는 방과후 책가방을 던져놓고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자성대 공원으로 달려가기 일수였다.
조그만한 비닐봉지에 담긴 포도 분말쥬스를 입에 물고
성벽을 타고 오르내리며 전쟁 놀이를 했었다.
때로는 성곽 꼭대기의 바위에 걸터앉아 생각에 들기도 했다.

일요일이면
친구들과 광안리바다까지 걸어가는 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 바다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언제나 2군데의 쉼터가 있었다.
대연동의 옛 수산대학과 자성대 공원.
지금은 부경대학교가 된 옛 수산대학 주변은
얕은 바닷물이 있는 갯벌과 보리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물 밑 갯벌에 발을 담구고 비벼서 대합등 조개를 잡아
보리밭에서 �은 보리이삭과 함께 구워 먹으며
여행길의 간식을 해결하기도 했었다.

바다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성대 성벽에 걸터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며 휴식을 갖곤 했었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러갔으나
부산진지성, 자성대의 성곽은 예전 그대로이다.
동문과 서문, 휴게시설과 체육시설들이 생기긴 하였으나
성벽 아래 숲길은 변함없었다.

도심 한가운데 역사의 흔적인
자성대와 영가대 산책입니다.







부산진지성을 흔히 자성대(子城臺)라고 말한다.
지금 남아있는 이 성은
선조 26년 왜장 모리 부자가 쌓은 일본식 성이다.
자성대는 부산진성을 모성(母城),
이 성을 부산진성에 부속된 성(子城)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또 산 정상에 자성을 만들고
장대(將臺)로 사용하였다는데서 나왔다고도 한다.

원래 이 왜성이 축조되기 전에 우리의 城이 있었다고도 한다.
임진왜란 전에 부산포에는 내성과 외성이 있었는데,
내성(內城)인 본성(本城)은 현재 정공단이 있는 일대를
중심으로 뒷산인 증산을 둘러싸고 있던 성이고,
자성대는 그 외성(外城)으로 쌓은 것인데,
이 외성을 왜군들이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왜성(倭城)으로 고쳐 쌓은 것이다.
왜군을 몰아낸 뒤에는
명나라 만세덕 휘하의 군대가 일시 주둔하였고,
이후 우리측에서 자성대를 중심으로 성과 사대문을 쌓고
관아를 정비하여 부산진첨사영으로 사용하였다.
일제 침략기에 들어 일제에 의해 성은 철거되고 말았으며,
자성대 일대의 해면은 매축되어 옛 모습은 없어졌다.

남아있는 성지(城址)는 2단이며,
성벽의 높이는 최고 10m에 최저 1.5m이다.

자성대에는 임진왜란에 참가한
명나라 장수 천만리의 후손이 세운 천장군기념비가 남아있고,
동쪽 산 중턱에는 최영장군비각이 보존되어 있다.
현재 동문과 서문 및 문류, 성벽의 일부가 복원되어있으며,
왜성은 정상부 주변을 중심으로 아래로 내려오면서 남아 있다.

...<자료출처 : 부산의 문화재/부산광역시 문화예술과 발행>...

















































영가대





영가대(永嘉臺)는
오늘날의 범일동 성남초등학교 서쪽 경부선 철로변에 있었다.
1905년 경부선 개통으로 철거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옛 터에 표지석만 세워져 있다.
이곳은 일본에 파견되었던 通信使行과 관련이 깊은 명소로,
1614년(광해군 6) 경상도 순찰사 권반(權盼)이
부산진성근처의 해안이 얕고 좁아 새로 선착장을 만들었는데,
이때 바다에서 퍼 올린 흙이 쌓여 작은 언덕이 생겼고
이 곳에 나무를 심고 정자(亭子)를 만들었다.

1617년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던 오윤겸(吳允謙)이
영가대에서 일본으로 출발한 이후 통신사행은
줄곧 이곳에서 해신제를 올리고 일본으로 갔다.
1624년(인조 2) 선위사 이민구가 일본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부산에 파견되었다가 이 정자를 보고 권반의 고향 안동의 옛 이름인
영가(永嘉)를 따서 <영가대>라고 이름지었다.
통신사행은 조선후기 한일관계를 밝혀주는 대표적인 선린사절로,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파견된 것은
1636년부터 1811년까지 총 9차례로 일본국왕의 요청으로,
막부(幕府)가 있는 에도(현 東京)에 파견된 사절이었다.
통신사행은 8개월간의 긴 여정으로
거친 대한해협을 건너가기란 무척 힘든 일정이었다.
통신사행은 출발 전에 영가대에서
안전 항해와 무사 귀환을 비는 해신제(海神祭)를 올렸다.
영가대는 경치가 빼어나 시인 묵객(墨客)은 물론
이곳을 거쳐간 통신사행들이 많은 시를 남겼다.

高臺蕭瑟出雲端 높은 대가 소슬하게 구름 끝에 솟았는데
陂水千尋石色磻 언덕 밑 천길 물에는 돌그림자 서려 있네.
艦穩如藏大壑 배들이 평온히 큰 구렁에 숨겨져 있는 듯
海中終日自波瀾 바다 가운데에는 온종일 물결이 치는구나.

...1643년 신유 <영가대>...


영가대는 1905년 경부선의 개통으로 양분되고
일제 강점기 때 일본상인 오이카와의 별장인 능풍장으로 옮겨졌다가
그 후 도시화 과정에서 그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2000년 부산광역시의 역사유적지 표석 설치계획에 따라
좌천동 지하철역 부근의 도로공원에
<부산포왜관,영가대터>표석을 세웠고,
2003년 동구청에서 자성대 인근에 영가대 정자를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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