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70 小寒, 그 시린 밤 사평역 부근에서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70 小寒, 그 시린 밤 사평역 부근에서

SHADHA 2004. 2. 12. 20:42
728x90


푸른샘




小寒, 그 시린 밤 사평역 부근에서.

01/06








小寒, 그 시린 밤 사평역 부근에서.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않은 기침 소리와
쓴 약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면서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며칠 내차던 추위가 살풋 수그린 小寒날, 전날 밤을 시모의 기일로 샌 뒤이기에 고향 門中산에 계시는 산소를 찾았습니다. 바람은 차가워도 햇살 따스한 무덤가에는 이른 쑥이 푸릇이 돋아나고 시든 잔디가 도리어 포근히 땅거죽을 덮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기일을 지내기 위한 음식 마련의 수고로 시누님들의 눈밖에 나지 않게 행사가 마무리되면, 그는 항상 하루 휴가를 내어서 어머니 산소에 나란히 다녀옵니다. 아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는 곁들여 장모님 산소까지 돌고 외갓집의 외숙에게도 문안을 드리고 돌아옵니다. 물론 그 사이에는 좀 맛있는 바깥음식도 사주며, 피로를 풀도록 온천에 가주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제도 국화 꽃 두 다발을 준비하여 한 행보 돌았습니다. 친정어머니 산소는 항쟁의 열사들이 잠든 望月동 무슨 영역 부근의 시립묘지에 있습니다. 항상 무심했던 마음이 부끄러워 꽃 한 다발도 가져가지 않았었는데 (죽은 후 효자는 다 할 수 있단다하시던 말씀이 아파서...) 두 분 똑같이 흰 국화와 노란 소국으로 만든 꽃다발을 가져가며, 나는 문득 어머니께 드릴 꽃에 얼굴을 묻고 깊이 향기를 맡아보았습니다. 국화의 은은한 향기 대신 맑고 투명한 무명 적삼같던 어머니의 체취만이 아련히 감겨왔습니다. 아, 어머니...


어머니가 누우신 곳은 구름이 손닿을 듯 하늘 가까운 높이에 있습니다. 발아래 너르게 펼쳐진 논과 밭, 그리고 시내의 건물들은 한갖 소소하게 보이고 먼 無等의 등허리를 타고 내리는 눈발과 구름이 이루는 운무의 흐름만이 가슴 안에 소용돌이를 일으킵니다. 생의 뜨거운 돌 하나 안아들고서 두 손과 가슴에 화상으로 쓰라려하던 시간들이, 이제 발아래 묻고 보니 은은한 삶의 온기를 지켜주는 온돌 하나 되었듯이... 어머니, 이생에서 못 다한 사랑일랑 그렇게 묻어버리고 가슴 밑바닥에 놓은 구운 돌처럼 이따금 되작거리며 살아요.


한 때는 남의 땅을 밟지 않았다던 진외갓집은 이제 쇠락하여 도시에 주인을 둔 이들의 논농사 후에 하우스 재배로 딸기를 키워 수확하고 있었습니다. 한창 씩씩한 녹색 포기 아래로 매화꽃 이파리처럼 떨어지는 꽃잎을 밀고 희붉은 딸기 알들이 송송히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아까워 머뭇거리며 몇 알 따주는 외종간 동서의 손길이 쓸쓸합니다. 천석군의 살림이 당대를 지키지 못하는 세월이 되고, 홀로된 고모님의 안타깝던 사촌은 이제 외가의 큰손님이 되었으니 사람의 운세란 그토록 순식간에 뒤집히는 것인지... 저녁 먹고 가라는 인사를 사양하고 돌아섭니다.


담양은 너른 들판을 가로지르며 펼쳐진 식영정, 소쇄원, 가사문학관 그리고 독수정 등에 담긴 亭子문학과 문화가 면면히 흐르는 곳입니다. 화순의 금호 리조트에서 온천하려던 계획을 버리고 대숲 차분한 소쇄원의 정원을 걷고싶었지만, 달리는 차를 세우지는 못하였습니다. 화순 온천은 유년시절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여름철 냉수 물맞던 赤壁이 가까이 있는 곳입니다. 아마도 적벽은 그 때부터 물 맞이와 원족길로 유명했던 것 같습니다. 지난해에도 여섯 가족이 함께 리조트에 머물며 가까운 물염정에 올라 호기를 다지고, 적벽 아래 맑은 물에서 물수제비 뜨기 대회를 벌여 상금을 탓던 즐거웠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화순 온천은 백 프로 원천수를 자랑하는 수질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내부 시설로 참 즐거운 곳이었습니다. 수영장이 딸려 있어서 온천수 수영을 즐기고 다시 황토방이나 고온 사우나로 피로를 풀 수 있습니다. 한방 약초를 거쳐 나오는 뽀얀 안개 사우나는 여름날 실비 맞으며 산 속을 헤매는 듯한 환상적인 분위기를 줍니다. 동굴 속에 홀로 들어가 냉온탕을 즐기기도 하고, 삼 백 년된 편백나무 판자로 욕조를 만든 히노끼탕은 은근한 히노끼타오르의 향을 풍기며, 어릴 적 커다란 무쇠솥 욕조에 널빤지를 깔고 하던 일본식 욕탕을 상기하게 합니다.


날아갈 듯 가벼운 몸과 마음을 싣고 집으로 향하는 길은 어느새 저물고 보름이 가까운 달은 왠지 구름 안에 숨어버리자, 이따금 차가운 눈가루가 불어와 앞창을 흐리게 합니다. 화순의 서쪽 방향에 있을 집을 향해서 달리는데, 길은 점점 깊은 산 속으로 접어들고 갑자기 모골이 송연하며 두려움이 찾아듭니다. 이십 여분의 산속길이 어찌나 칙칙한지 산적이든 귀신이든 만나기만 하면 자지러질 것 같습니다. 그 때 문득 바람막이 정류장에 쓰인 사평이라는 글씨를 읽었습니다. <신 화첩기행>의 김병종교수는 아주 최근에 곽시인의 사평역을 찾아 나섰으나, 결국 찾지 못하자 아마도 그가 남평역을 무릉도원처럼 은유로 바꾸어 한 것이 아니냐고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평을 발견한 것입니다. 사평은 은유적인 초현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실존하는 지명이라는데 확인이 된 것입니다. 부리나케 차를 세우고 지도를 살펴보았습니다. 화순의 고인돌 공원과 백민 미술관 근처 강과 평지로 이루어진 '사평'이 '이서' 지나 주암호 곁에 있습니다. 그리고 인적 드문 심심산골에 작은 역 하나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곽재구시인은 그 멋들어진 서울내기에게 끝내 사평역을 숨긴 것입니다. 사평역을 깊은 겨울밤 좀처럼 막차가 오지 않는 간이역으로 남겨두기 위해 부드러운 남도의 미소로 감싸버린 것이겠지요.


문득 삽시간에 두려움은 사라지고 서쪽으로 내달리는 차의 오른 쪽으로 뚜렷이 밝은 북극성 별 하나가 환하게 반짝이며 따라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것을 깨달은 마음은 몹시 두근거리며, 오아시스가 숨은 사막을 지나는 기대와 장미가 사는 별을 바라보는 행복한 어린 왕자의 마음으로 겁 없이 집을 찾아 달렸습니다. 스러져 가는 톱밥 난로에 한 줌 톱밥을 던지듯 아직도 자신 없어 머뭇거리는 그의 가슴에 "맞아, 이 길이 분명해." 한 줌의 용기를 불빛 속에 던져 주었습니다.


'01.01.6  
어린 왕자를 만난 푸른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