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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72 에드바르드 뭉크, 뭉크 뭉크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72 에드바르드 뭉크, 뭉크 뭉크

SHADHA 2004. 2. 12. 20:45


푸른샘




에드바르드 뭉크, 뭉크 뭉크

01/11









에드바르드 뭉크, 뭉크 뭉크


초겨울 들면서 도서관에서 가져온 책들 중에 조금씩 읽히며 많은 생각을 남기고 그림에의 욕구를 일깨워 준 책은 마티아스 아르놀트의 <뭉크>입니다. 물론 고흐, 세잔느, 고갱 그리고 로댕 등 고전적인 화가들의 전기나 畵集을 잔뜩 쌓아놓았지만, 아직 표지도 열지 못하고 뭉크에 머물러 있는 것은 그의 겁주지 않는 서툰 듯한 화필과 태연자약한 표현력입니다.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기술이나 방법이 세련되고 능숙하여 그저 감탄만 하게 하는 작가였다면 잠시의 경외로 끝났겠지요. 그러나 뭉크가 가진 것은 단지 기술이 아니라 불안정한 자신의 삶과의 불화를 설명하려는 깊은 자기성찰에 뿌리박은 정신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가 일생동안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일종의 병이고 도취였으며, 그 자신 그 병은 벗어나고 싶지 않은 병이고 그 도취는 필요한 도취라고 말합니다. 풍요로운 자연을 그리되 그의 시각적 경험을 통해서 인류에게 분명한 선물이 될만한 예술, 즉 심장의 피로써 그린 자기 고백적인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예술 세계에서 바다는 영혼의 상징이었고, 그를 늘 따라다니던 사랑, 병, 죽음에 대한 공포는 한 마리 맹금처럼 그의 심장을 꽉 움켜쥐고 부리로 가슴을 후벼파며 날개를 쳐서 오성을 흐리는 敵이었습니다.


그의 초기 삼대 대표작 <병든 아이> <사춘기> <그 다음 날> 중에서 <병든 아이>는 매우 엄격한 세잔느적 구도에 램브란트적 빛의 효과를 시도하며 솜털처럼 연약한 아이와 절망하는 어머니를 배치함으로서 죽음의 문턱에서 두 인간이 겪는 친밀함과 소원함 사이의 역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를 향한 관객들의 비명과 조소를 온몸으로 견디며 한 소녀가 여성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묘사한 <사춘기>는 그의 누이를 모델로 하여 그려진 그림으로 아직도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단지 소녀의 성장기인가? 순결을 잃고, 그 순결이 오용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인가? 이제 막 눈 떠 가는 성욕을 묘사한 것인가? 에로틱한 백일몽에서 깨어난 후의 아쉬움은 배경의 그림자인가...


어제 나는 畵室에서 열 다섯 살의 한 소녀를 만났습니다. 선생님이 대학 입시를 응원하러 가신 후라 그 소녀와 나는 단 둘이 이젤을 나란히 세우고 서 있었습니다. 나는 요즘 그리는 인물화 숙제를 하려고 했지만 도무지 연필을 시작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슬며시 내게 다가와 화면을 나누는 법과 인물의 기울기를 보는 법, 포인트를 둘 곳 등에 대해 가르쳐 주었습니다. 얼굴의 이목구비에 이미지를 나타내고 '어둠의 흐름을 따라 쫙 깔아주세요'라고 매우 詩的으로 말하며, 척척 그어 가는 음영의 필치 속에 나는 소녀의 얼굴을 훔쳐보았습니다. 커다란 눈동자와 발그레한 볼의 사춘기 소녀가 거기 서있었습니다.


나는 때로 사우나실 의자에 벌거벗은 채 호기심과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설렘을 섞은 소녀처럼, 다리와 손을 모으고 앉아 그 나이적의 내 모습으로 뭉크의 사춘기 누이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후로 헤쳐온 시간들을 회상해 봅니다. 아마 이 세상의 모든 소녀들에게 담긴 심적 상황을 그렇게 잘 나타낸 그림은 드물겠지요? 뭉크가 일시 젖어들었던 보헤미아 운동의 계명 중에는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소녀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실존의 암초를 무사히 피해 생의 말년에 이르렀을 때 '아, 진정 후회 없는 삶이었어.'하고 말할 수 있기를 나는 그 친절한 화가 소녀에게 빌어 주었습니다.


뭉크는 초상화와 판화로 그만의 독특한 영역을 구축해 갔으며, 당시의 리얼리즘을 벗어난 인상주의적 실험과 문학적 상징주의와 유사한 클로아조니스트 화법 등의 영향을 받아가며 색채는 음악처럼 진동해야 한다는 고갱과 고흐의 요청에 부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프로이드가 심리연구에 발을 들여놓을 무렵, 현대 영혼의 삶에 대한 심상들을 '삶의 프리즈' 연작들을 통해서 표출하였습니다. 우울, 절망, 절규, 위로, 두 사람, 재, 삶의 무도, 병실의 죽음, 질투, 매혹, 결별, 등의 표제 아래 그의 영혼의 상태를 통째로 고스란히 드러낸 것입니다.


일찍이 첫사랑의 여인, 살로메가 남긴 상처는 다시 그가 사랑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그 후로도 항상 자아가 강하고 독단적인 특정 유형의 여인들을 선택했던 그는 이미 좌절이 예정된 사랑이 그를 배신할 때마다  여인의 긴 넝쿨같은 머리카락이 남성의 머리를 휘감아 교살하는 상징적 비유를 상상했습니다. 여인의 머리카락에 감싸인 우울한 남자가 있는 <매혹>, <결별>을 그린 후에는 "네가 바다를 건너 나를 떠난 후 가는 실들이 우리를 묶어주는 것 같았다. 그것은 상처처럼 아팠다."고 고백했으니 그것은 또한 남성이 빠져드는 원시림같은 덤불이며 불가해한 요소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따금 사랑 안에서 무아지경을 느끼기도 했으나 뭉크의 경우 사랑이 주는 행복은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죽음이 시작되는 지점이요, 또한 고통과 형벌이기도 하였습니다.


말년의 그는 고향 노르웨이로 귀환하여 피오르드해안의 풍경과 여러 장의 자화상, 그리고 노동자들을 그립니다. 자신의 작업장에 자신의 작품을 입회시키는 독특한 필요성으로 자기의 작품 수집에 열중하고 그들을 노천 아뜰리에에 방치하여 세상의 물질과 결합하고 시간에 의해 손상되는 것을 즐겨하였습니다. 작품들이 곱게 보존되는 상태란 무의미하다는 그의 지론은 그 자신의 생명조차도 영원한 循環, 신진대사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태어났을 때 벌써 한 번 죽었다. 사람들이 죽음이라고 부르는 본래적인 탄생을 나는 아직 눈 앞에 두고 있다... 부패한 나의 몸뚱어리에서 꽃들이 자라나고 나는 그 꽃들 속에 존재하겠지... 죽음은 삶의 시작이며 - 또 하나의 새로운 결정 과정의 시초이다... 우리가 죽는 것이 아니라 - 세상이 죽어 우리를 떠난다.> 그는 진실로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열렬한 추종자였습니다. '짜라투스트라'를 반복해서 읽었고 니체의 초상을 '예언자와 인간이 한데 녹아들어 간 장엄한 그림'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현재 뭉크의 예술적 유산인 만 오천 점의 작품은 오슬로시의 퇴위엔 섬에 뭉크 개인 미술관에 소장되어있습니다. 그가 남긴 귀중한 글들은 뭉크와 가족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누이 잉게르가 모두 소각하여 버렸기에, 아쉽게도 그의 예술사적 의미와 작품 이해에 어두운 그림자를 지워 놓았습니다.  


'01.01.11
뭉크를 벗어나며 푸른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