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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77 야자수 나무 그늘 아래 누워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77 야자수 나무 그늘 아래 누워

SHADHA 2004. 2. 12. 20:57


푸른샘




야자수 나무 그늘 아래 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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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수 나무 그늘 아래 누워...


새를 타고 떠나온 곳에서 새소리에 잠이 깹니다. 가까이 있는 태록 바랑 어촌에서 들려오는지, 느닷없는 장닭 우는소리가 잠 깰 때마다 세상과 나 사이에 되살아나는 새벽의 거리감을 지워주며 두려움 없이 일어나게 합니다. 두 겹의 커튼을 밀고 창을 엽니다. 발코니에 쌓인 꽃들이 바람에 날려 빙빙 돌며 낙하하는 곳에 푸른 물이 가득한 수영장이 잠들어 있습니다. 다시 갈매기 우는소리도 들립니다. 새벽 바다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잠든 듯 고요한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여행에 가지고 간 단 한 권의 책은 장 그르니에의 <섬>입니다. 나는 이 책의 주인을 안고 가듯이 두 팔을 가슴에 꼭 끼고 생각에 빠졌습니다. <혼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설은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나는 몇 번씩이나 해보았었다. 그리하여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아보았으면 싶었다.> 낯선 도시와 낯선 해변의 다른 점은 겸허와 남루의 차이였을까... 아직 태양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발뿌리만 내려다보며 걷던 길에서 문득 낯익은 일년초를 만났습니다. 여기 저기 군락을 이루며 분홍과 진홍으로 피어있는 꽃은 뜻밖에도 봉숭아꽃이었습니다. 아, 누군가 여기에 이 꽃의 씨앗을 뿌렸을까. 조선의 울안에 함초롬히 서있던 꽃이 야생의 모래 언덕 근처에서 굳세게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꽃잎을 따서 손가락으로 짓이겨 양손의 새끼손톱 위에 올려놓습니다. 금방 주황빛으로 물듭니다. 마음조차 아릿하게 물들어 옵니다. 아마 두어 달 동안 이 꽃 물은 내 손끝에 남아서 이 모든 것들을 기억나게 하겠지요.


식당의 내밀은 테라스에서 아침을 먹었습니다. 서쪽 海岸이어선지 태양은 소문없이 떠올라 따가운 햇살로 발끝에 머뭅니다. 어디선지 날아온 진초록의 예쁜 새 한 마리가 겁도 없이 다가와 호록거리며 빤히 치어다 봅니다. 아마 빵이 먹고싶은가 봅니다. 토스트 조각을 찢어 가만히 내밀었더니 종종거리며 다가와 물어갑니다. 다시 수영장의 물에 적셔서 물고는 어디론가 날아갑니다. 아마 애기새가 기다리는 집이 있나봅니다.


오전에 택시를 빌려서 페낭의 갈만한 곳을 두루 돌았습니다. 바틱이라는 직물의 독특한 염색 공장에서 파라핀 냄새를 맡으며 일하는 어린 소녀, 열악한 그곳 환경에 마음 아팟습니다. 갖가지 식물과 곤충들 그리고 나비들의 천국인 버터플라이 팜에는 세상의 온갖 나비가 다 있습니다. 죽은 나비의 표본을 유리 상자에 담아 판매하는 곳에선 날개 예쁜 나비의 비싼 가격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죠지 타운에 있는 콘웰 요새는 일본 전함을 향한 영국군의 대포가 아직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砲身을 어루만지며 야릇한 농담을 나누는 일본 관광객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커다란 와佛이 누워있는 불교사원 주변은 향불 냄새가 진동한데 우리 나라에서와 꼭 같이 생긴 참새들이 돌아다니며 벌레들을 잡아먹고 있습니다. 이모작, 삼모작의 벼농사가 있는 곳이라 이곳에도 참새가 사는 것 같습니다. 죠지타운 교회와 나란히 있는 페낭 뮤지움에선 이곳 역사의 대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인디안과 중국인, 그리고 일본인과 말레이인, 거기에 합류한 영국인들로 혼합된 인종과 종교, 피부 색깔의 다양함이 영어로 소통하며 사이좋게 섞여 있는 곳입니다.


무엇보다 부러운 것은 천혜의 자연 자원과 풍광입니다. 기름이 풍부하니 간 곳마다 실내는 추울 정도로 냉방이 잘되어있고 태양을 듬뿍 받아 잘 자란 식물들은 저녁 무렵이면 잠시 스치는 스콜로 산뜻하게 샤워하여 더 푸른빛으로 반짝거립니다. 억키꽃 바람에 떨어지는 풀장에서 수영을 했습니다. 더없이 맑은 물은 햇빛을 반사해서 전신을 고루 태워줍니다. 비치 의자에 부끄럼없이 드러누운 하얀 인종들의 썬텐을 엿보며 물 속에 선 채로 맥주를 마십니다. 아침에 보았던 새(아마 티티새일까)가 다가와 목을 축입니다.


누각 경치로는 악양루가 그만
강물 아득히 흐르고 동정호가 탁 트였네
기러기는 내 맘 속 근심 끌고 날아가고
산은 둥근 달 머금고 다가서네
구름 사이에 잠시 머물고
하늘 위에서 술잔 주고 받네
취하니 또 서늘한 바람 일어
너울너울 춤추는 사람 옷소매를 휘마르네


        악양루에 올라     -이백


백색의 아름다운 호텔 아래로 푸른 물을 가두어 두고, 예쁜 새가 다가와 목 축이는 물 속에 분홍빛 꽃들과 함께 몸을 담근 채, 차디찬 칼스버그 맥주 한잔으로 눈을 맞추며 벗은 몸이 부끄럽지 않으니 그야말로 이태백이 부럽지 않은 好事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파파야와 파인애플 그리고 야자나무가 던져주는 그늘 아래 길게 누워 젖은 몸을 말리며 책을 읽습니다.


<사람들은 여행이란 왜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있는 감정을 일깨우는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불가능한 일-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 그 장소, 그 순간에 우리가 바라본 어떤 고장의 풍경은, ... 우리들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다. ... 즉 잊었던 친구를 만나서 깜짝 놀라듯이 어떤 낯 설은 도시를 앞에 두고 깜짝 놀랄 때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다.>  


눈을 감으니 붉은 태양이 안전에 가득합니다. 적도 가까운 이곳에서는 아마도 태양은 하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디나 프리즘의 분광으로 흩뿌려진 듯 빛이 넘쳐납니다. 온몸으로 빛을 만나며 심해 깊은 곳의 물고기처럼 납작하게 엎드립니다. 또 하나의 나를 대면하여 뜨거운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듣습니다. <희열은 비극성의 절정인 것이다. 어떤 정열의 소용돌이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영혼 속에는 엄청난 침묵이 찾아든다.>


'01.01.29

행운의 섬에서 푸른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