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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78 블랙 혹은 화이트, 그 혼합과 복합의 세상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78 블랙 혹은 화이트, 그 혼합과 복합의 세상

SHADHA 2004. 2. 12. 21:00


푸른샘




블랙 혹은 화이트, 그 혼합과 복합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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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혹은 화이트, 그 혼합과 복합의 세상


어제는 설날이었습니다. 아침엔 맑은 쌀죽에다 오이 피클 비슷한 것, 그리고 카야 쥬스로 대신하였고 점심은 냉장고에 사다둔 파파야와 노란 메론으로 떼웠기에 이른 저녁을 먹자고 호텔을 나섰습니다. 마침 이곳에 와서 사귄 택시 운전기사인 핫산을 만났습니다. 그는 어제부터 핫산에게 럽스터 잘하는 깨끗한 식당을 소개하라고 했기에 핫산은 데려다주겠다고 합니다. 핏싱 에리아 부근에 있는 자기 아파트를 보여주기도 하며 찾아간 식당은 아무래도 명절이라선지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내려서 천천히 찾기로 하고 그를 먼저 보냈습니다.


중국인들의 명절이라서 인디언이나 다른 종족의 가게들은 혹간 열려있지만 음식 단속이 심한 그 때문에 깨끗한 식당을 찾아 얼마나 걸었습니다. 도마에 파리가 백 마리쯤 붙은 인도인 식당의 주방을 들여다보고 기겁하여 나오기도 합니다. 해안을 따라 걷다가 소나기를 맞으며 로얄 파크 호텔 부근의 비치에서 노을을 보았습니다. 호텔 유리벽에 반사되는 황금빛 오렌지의 노을은 가슴을 뭉클하게 흔들어주며, 우아함과 신비함이 섞인 환상적 자태로 바다 가운데로 서서히 녹아 내립니다. 잎 넓은 나무마다 잠자리를 정하는 까마귀 떼들의 날개 짓이 부산해지자 어디선가 어둠이 불려온 듯 순식간에 사위가 캄캄해집니다.  


결국은 각 호텔 디너를 모두 첵크한 그의 뜻대로 홀리데이 인 호텔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안심과 양고기꽂이의 바비큐 냄새가 진동하는 옥외에서 생선과 새우 구이로 정해진 식사를 하고, 그렇게 바라던 럽스터 구이를 먹으며 곁에서 도와주는 디렉터, 에릭 나탄의  부드러운 발음과 미소 그리고 풍덩 빠질 듯 깊은 눈 속을 바라봅니다. 아무래도 검은 눈동자의 진수는 이곳 말레이시아인 뿐인가 싶습니다. 준수한 이목구비의 얼굴과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친절한 태도는 묻어날 듯 검은 피부까지도 오히려 고혹적으로 느껴지게 합니다.  


밤의 해안 거리는 갑짜기 나타난 야시장의 불빛으로 휘황해졌습니다. 굉음을 내며 달리는 오토바이와 택시들의 행렬을 피해 현란한 무늬의 헝겊들이 내걸린 인디언 주인의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수영복 위에 두르는 보자기같은 치마와 한 조각 천으로 입는 원피스를 주로 파는 곳입니다. 단순한 랩스커트 하나로 아주 여성스러워 보이던 풀장에서의 유럽 여인들의 자태가 생각나서 열대의 꽃무늬가 프린트된 것으로 두 장 샀습니다. 가짜 바틱이지요. 이곳의 야시장은 가짜 라벨의 시계와 썬 글라스, 주석 공예품 등을 주로 파는 것 같았습니다. 노천 카페에서 마신 생맥주 한잔으로 제법 휘청거리며 돌아와 짐을 꾸렸습니다.


아침 일찍 랑가위로 가는 고속 페리호를 타기 위해 일곱 시에 핫산을 오도록 했습니다. 그는 몹시 정확하고 셈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아니 이곳에서 만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심 많은 한국인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친절하고 투명합니다. 배편은 며칠 전에 매진되어버렸기에 페리를 못 타면 육로를 이용해서 랑가위 섬으로 가는 방법을 해안에서 우연히 만난 인도네시아인(공무원인데 휴가 중인)에게 자세히 물어두었습니다. 새벽의 죠지타운 거리는 아직까지 나무에 장식된 크리스마스용 꼬마등으로 장난스런 소인국처럼 보입니다.


대기 9,10번으로 이름을 적어두고 길거리에 쪼그려 앉아 기다리기를 한 시간, 아침이 활짝 밝아지는데 8시에 떠난다는 배는 출발할 것 같지 않습니다. 곁에 함께 기다리던 배낭족 청년 안드레아스에게 그가 말을 겁니다. 호주 대학에 다니다가 싱가폴에서 일을 하며 경험을 쌓는다는 건축학도라 합니다. 맑고 수줍은 눈빛이 어찌나 여리게 보이는지, 택시로 동행할 양으로 배를 못 타면 어떻게 할테냐고 물었습니다. 아직 아무 계획이 없다고 합니다. 묵을 숙소도 정하지 않고 그냥 떠도는 여행인가 봅니다. 결국은 그와 우리까지 반환된 표를 구입하고 배가 정박한 곳까지 힘껏 달립니다. 아무래도 걸음 느린 내 짐을 그가 들어줍니다.  


페리는 버스 두 대를 붙여 논 정도의 작은 배인데 속도는 무척 빠릅니다. 창문 밖으로 남겨진 페낭의 연안에 현대 건설이 세운 페낭 브릿지가 멀어집니다. 배 안에도 한국 사람은 전혀 안보이고 부유한 중국인 신혼부부들인지 두냥 정도의 무거운 순금 팔찌와 반지를 몇 개씩 걸친 젊은 여인의 팔목들이 머리를 만질 때마다 요란하게 번쩍거립니다. 배를 내릴 때쯤 화면에서는 첩보영화인지 긴박감 넘치는 장면이 폭음 속에 끝나고, 말레이시아 유명 여가수의 서정성 넘치는 노래가 뮤직 비디오로 비취며 여행객의 가슴을 파고듭니다.


페낭에서 랑가위까지 비행기로 30분, 육로로는 3시간정도의 거리를 1시간 40분만에 도착하였습니다. 선착장 부근의 커다란 독수리상이 이곳이 랑가위라는 걸 알게 합니다. 랑가위는 독수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몸집이 우람한 버마인 삐끼를 따라 호텔 예약을 맡아주는 인도인 사무실에 들렸습니다. 몸피 작고 날렵한 로스미는 정말 영리하고 친절한데 눈치 빠르기가 입안의 혀 같습니다. 굿이나 나이스, 비유티플이 아니면 말이 안됩니다. 아무튼 그의 소개로 공항 가까이 있는 비유티플한 랑가수카 리조트에 들었습니다. 삼층의 낮은 건물이 여러 동 늘어선 사이로 잘 가꾼 정원에는 초록과 노랑이 섞인 꾀꼬리 두 마리가 날아다니며 명랑한 목소리로 우리를 반기는 듯 했습니다. 그 꾀꼬리 소리는 오래 전 청평 호반의 기억을 일깨워 주며 더 행복하게 하였습니다.


짐을 풀고 해변에 나서니 태양은 단숨에 살을 익힐 듯 하얀 모래사장 위로 폭포처럼 퍼붓습니다. 갈대로 엮어 올린 원두막 형태의 그늘 아래 하얀 비치의자를 놓고 태양에 굶주린 北歐인들인지 겁없이 썬텐을 하고 있습니다. 벌겋게 익은 살이 거의 화상에 가깝게 되었는데 개의치 않고 태웁니다. 한적한 주변은 Sunset avenue라는 팻말로 길이 열려있습니다. 그 길따라 검은 모래가 깔린 해변을 걸어 코코 비치에 있는 해양 요리 전문집까지 가자고 나섰습니다. 그 도중에 있는 Mara대학은 6년 전 리조트를 사서 이천 명의 학생을 수용하는 기숙사로 이용하고 있다합니다. 해변에서 조개를 줍는 게 유일한 오락인 그곳 여학생들을 만났습니다. 머리에 수건을 쓴 모슬렘의 여인들이 내게는 왜그리 슬픈지 모르겠습니다.


모래밭에 함께 앉아 그녀들과 조개를 찾으며 음식점에서 내건 스피커의 음악을 듣습니다. 오래된 팝이더군요.
멀리 바다 끝에서부터 석양이 찾아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뜨겁게 붉은 이곳의 낙조는 바라보는 모든 이의 눈과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강렬한 화인을 찍어버립니다. 밤에 빌려다 본 페낭 출신의 사진 작가 C. T. Fong은 낙조의 사진 아래 이렇게 썼더군요.





'01.01.30

사진 속에 빠져서 잠들었던 푸른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