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샘
사랑하는 내 아들, 숀에게
01/21
사랑하는 숀에게
오늘 하루 나는 짧은 기차 여행을 다녀왔다. 새벽에 눈을 뜨며, 그리고 출발하기 전, 너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전화했었다. 결국 룸메이트에게 들은 바로는 아침도 안 먹고 오토바이를 타고 도서관에 올라갔다 하더구나. 엄마에게 전화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종일 벨이 울리지 않아 몹시 허전했단다. 떠나기 전 뉴스에서 전북 무주, 장수에 내리는 폭설 소식을 들었는데, 기차는 가끔 안개처럼 고운 눈보라가 날리는 視界 속으로 거침없이 달리더구나.
오늘 다녀온 일은 우리 분야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지난 번 쓴 책을 증보하려고 자료를 나누고 논의하는 그런 모임이었다. 그런 일에 수동적인 엄마의 성격을 잘 알지? 허지만 항상 뒤에 서있을 수만은 없는 때도 있단다. 꾸준히 배우고 아는 지식을 수렴해 두는 일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나빠지는 視力을 벌충하듯이 眼力을 기르는데도 애를 쓰고 있단다. 아마 겨울에 시작한 그림도 그런 의미를 주는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이고, 그려진 것은 다 외울 수 있었다. 나는 비로소 빛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제는 면으로 나누인 아그립바 장군의 석고 뎃상을 완성하고, 環形 아그립바의 구도를 잡아두었다. 얼마간의 여행에서 돌아오면 또 잊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참, 모래 오전쯤 네가 뇌즙을 짜내며 시험지 위에 몰두해 있을 때, 엄마는 계획된 여행을 가게 되었다. 떠나기 전날 네게 가서 이따금 그러하듯이 너를 가운데 두고 셋이서 멋대로 뒤엉켜 자려고 했다. 그런데 네 시험이 그날 있다는 걸 알고 아빠는 고모댁으로 방향을 돌리셨다. 아마 단 1점이라도 방해하지 않고 싶은 염려이시겠지, 그러나 엄마는 너의 뛰어난 기억력과 대범함이 능히 이길 수 있다고 보고 너에게 가고싶었다. 그러나 지난 번 일도 있는 발생학 시험이라니 엄마도 좀 조심스럽구나.
발생학은 나도 세 학기쯤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교수님들은 모두 좋으셨지. 그리고 내게 무척 잘 해주셔서 한 분은 돌아가셨지만 두 분께는 지금도 연락을 드리고 있잖니. 네게 도움이 될까해서 요약본을 보낼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오래된 내 방식의 공부를 네게 굴레 씌우고싶지 않아 그만 두었다. 그리고 벌써 두어 주일 전부터 도서관에 파묻힌 네가 좀 단단히 했을까 믿는다. 엄마는 그 시간에 네게 지혜가 펑펑 솟아나기를 기도만 하련다.
아빠와 함께 가는 해외여행은 처음이잖니. 각자가 따로 다닐 때는 그다지 너희들 걱정은 안 했었다. 위험 같은 것도 두렵지 않았지. 참 네가 중학생일 때 함께 갔던 미국에서의 일을 기억하겠지? 보스톤 공항에 내린 자정 가까운 시간, 예약된 호텔에서 나온 사람은 가버리고 여름이지만 황량한 바람 부는 역구내 안내에서 빈방을 찾고 택시를 불러서 찾아갔던 일. 월남인이 주인인 엽기적 분위기의 여관 로비, 그곳까지 가는 한 시간 쯤을 쉼없이 택시기사와 대화하는 엄마가 영어를 아주 잘 하는 줄 알았지? 그건 오직 공포의 힘이었어. 머릿속에 몇 십 년 동안 잠자던 영어가 그 한 시간에 총력을 다해서 쏟아져 나온 것이지.
그날 밤 아무 걱정 없이 잠든 네 곁에서 나는 과일 깎아먹으려고 가지고 다니던 주머니칼을 한 손에 꼭 쥐고 한숨도 자지 못했다. 켜진 불빛 아래로 작은 바퀴들이 유유히 기어다니는 더러운 벽을 바라보며 그저 순하고 평화로운 네 숨소리만이 위안이었지. 그러자 너와 함께 있는 일에 점점 용기가 났지. 그 다음부터는 고비를 넘기며 도리어 즐거웠잖아. 뉴욕의 할렘거리를 지나 차이나타운까지 혼자 만두를 먹으러 가고, 센트랄 파크에서 자전거를 빌려 하루 종일 놀다온 네가 지금 생각해도 대견해. 물론 작년에 혼자 다녀온 사십 일간의 유럽 여행도 대단하고.
이번 여행은 결코 사치나 낭비가 아니라 그 동안의 절제된 생활에서 얻은 사은품이나 경품이라고 여기고 축복해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네게 아무 말 없이 갈 수는 없구나. 충고나 늘어놓는 어머니 역할은 일찌감치 벗어버리려고 했지만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네게 잔소리를 하겠니. 딱 두 가지만 부탁하고싶다. 하나는 네 시간과 인생 혹은 소유물을 걸고 절대 도박은 하지 말아라. 그렇다고 조심만 하라는 것은 아니다. 네가 이따금 엄마를 설득하려고 쓰는 단어 중에서 <어차피>라는 말을 나는 가장 싫어한다. 나는 정말 환경에 순응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그건 여자의 삶이 가진 불가피한 고개 때문이었지 도전없이 포기한 적은 없다. 너는 부디 무엇이든 함부로 내던지지도 말고, 강하고 대담하기를 바란다면 내 욕심일까?
그리고 또 하나 네 동생 - 재기발랄하고 낙천적인 놈, 항상 행복한 그 애에게 나는 자유를 주었다. 기대하지 않았다기보다는 너와는 다르게 살아도 무방하다고 여긴 것이지. 어느 쪽이 좋은 母子關係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너는 동생에게만은 엄한 태도를 가져주기를 바란다. 감히 무시하지 못하도록, 물론 그러기에는 너 자신의 위신이 서야하겠지. 그러면 네 인생에 어려움은 아무 것도 없으리라 여긴다. 물론 네가 현명하고 현실적인 여성을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 등은 모두 하느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세상에는 성실하고 진지한 사람이 많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내가 아는 남자 중에도 세 명이나 있었으니까. 한 분은 나의 아버지고 한 분은 너의 아버지이다. 내 아버지께 나는 큰 상처를 드린 적이 있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당신과 같은 성실과 진지의 표본, 네 아빠를 선택했을 때였다. 아버지께서는 왜 그걸 그다지 중히 여기지 않으셨을까. 좀더 훌륭하기를 바라셨을까. 둘 다를 갖추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르셨단 말일까. 그런 아버지의 야망이 유전되어 나로 하여금 자주 상처받게 하였다. 물론 너의 아버지로부터... 그러나 넌 다를 것이다.
始溫아, 나는 네가 태어났을 때 이미 네 이름 속에 따스함 하나 숨겨놓았다. 네가 따뜻하면 세상도 너에게 따뜻할 것이다. 네가 존엄하기를 바라면 세상의 온갖 풍랑도 너를 고상하게 놔둘 것이다. 엄마는 항상 자중자애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자기를 멸시하는 사람은 다른 이를 증오한다. 그래, 엄마의 삶과 손길이 스친 곳곳에는 많은 비밀과 보물이 숨어있다. 네가 하나하나 알아가고 찾아가는 일에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세상 누구보다도 내게 가장 관대하고 따스한 아들, 너인 것을 엄마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 삶의 반절은 너를 생각하며 시작되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너는 점점 멀어지는 내 모습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건 사이 좋기 위한 거리이며, 한편으로는 이별을 위한 연습이다. 엄마는 언젠가는 아주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조금은 서운해도 네게는 숨통 트이는 일이다. 내가 네게 주고싶은 항목에는 자유, 그러나 내가 상처받지 않는 분리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엄마가 너 아닌 가장 익숙한 남자와 떠나는 것을 너도 익숙히 바라보기를...
항상 네게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길 빌며 줄인다. 잘 지내라.
'01.01.21 깊은 밤에
너의 영원한 후원자,엄마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