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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80 쿠알라 룸프르에 비는 내리고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80 쿠알라 룸프르에 비는 내리고

SHADHA 2004. 2. 12. 21:05


푸른샘




쿠알라 룸프르에 비는 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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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알라 룸프르에 비는 내리고...  


공항에서 한 시간을 달려 시내로 들어섭니다. 저물 녁 흩뿌리는 비에 나그네의 마음을 한없이 낮게 젖어버리고, 그래도 도착한 호텔의 입구는 설렘과 분주함이 뒤섞여있어 호기심으로 두리번거리게 합니다. 검은 톰 아저씨같은 포터의 도움으로 방에 올라 가보니 시내의 호텔은 그런가요. 난생 처음 보는 호화스러움에 황홀할 지경입니다. 널다란 유리부스 속에서 샤워하고 드레스 룸에 옷을 펴서 걸어둡니다. 내일 떠날 때 입어야할 겨울 외투들입니다. 크고 장식이 아름다운 책상에서 엽서 한 장을 써둡니다. 아마 결국은 부치지 못할 것입니다.


내 인생의 가이드, 이번 여행의 동행과 함께 마지막 밤을 즐기기 위해 거리로 나섰습니다. 가는 안개비 속에 거리는 아직도 성탄절 장식燈으로 휘황합니다. 실내에 둔 나무마다 붉은 리번과 붉은 봉투가 매달려 있습니다. 쿠알라 룸프르 시 중심(KLCC)에 있는 쌍둥이 빌딩의 수리아 백화점에 장을 보러 들렸습니다. 지하 마켓에서 몇 가지 과일과 맥주, 생리대를 샀습니다. 내친 김에 백화점 안을 구경합니다. 이름만 듣던 유명 브렌드의 샾들이 너무도 우아하고 아름답게 진열되어 있습니다. 다른 곳은 다 그저 지나쳐도 티파니만은 꼭 보고싶어서 들어갑니다. 권총을 찬 도어맨이 문을 열어줍니다. 별반 비싸지 않은 보석만이 진열장에 있을 뿐입니다. 아마 숨은 금고가 귀부인에게만 공개되겠지요.


랑가위에서 갑자기 시작된 생리로 당황하던 아침, 어제부터 상냥하게 책도 빌려주던 식당 아가씨에게 사진집을 돌려주며 물어보았습니다. 그녀는 고맙게도 중국인 주인에게 귓속말로 전하고 젊은 안주인은 내실에서 자기의 페드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것도 손을 꼭 잡고 화장실 앞에까지 걸어가서 살짝 주머니에 넣어주는 것이 어찌나 귀여운지, 아 세상의 여자들은 모두 다 여자다운데 나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항상 작업하는 자세로 간편한 옷을 입고 남자처럼 씩씩하게 걷고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필요없는 대답은 생략해버리는 무심한 자세로 오래 살아온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여행중의 많은 부부들을 보았습니다. 함께 오래 익숙하여 외모까지 너무도 닮아버린 사람들이 나란히 걸으며 쉼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우아한 스커트를 챙겨 입고 예쁘게 화장하고 다정하게 짝을 바라보는 그녀들의 따스함이 내겐 아픈 채찍이 되었습니다. 예전엔 나의 유일한 장점이 여자답다는 것 아니었던가... 그런데 내 인생의 어디쯤에서 나는 그걸 잃어 버렸을까. 그의 커다란 몸 뒤에 숨자 비는 반쯤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시장기가 들어 길거리에서 환히 들여다보이는 콩코드 호텔의 식당에 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 유난히 눈이 큰 말레이 아가씨가 단번에 우리를 알아봅니다. 부산에 친구가 있고 한국에 다녀온 적이 있다나요.


젖은 머리를 닦기 위한 수건을 주고 창가의 전망 좋은 곳으로 안내해 줍니다. 그래도 흡연석이라며 몹시 미안해합니다. 뒤돌아선 날씬한 다리가 하얀 싹스 속에 너무나 단정합니다. 그토록 쌕시하며 그렇게 정갈함이 뒤섞여 풍기는 분위기가 마음을 뒤흔듭니다. 식사는 어디서나 그렇듯 인도식과 서구식, 그리고 중국식이 혼합된 뷔페입니다. 돼지고기만이 찾아보기 어렵고 쏘세지도 모두 치킨 쏘세지뿐입니다. 삶은 배추 나물같은 것에 녹두죽 비슷한 것으로 요기를 하는데 어디선지 '카사블랑카'를 생음악으로 부르는 것이 들립니다.


호텔 전속의 4인조 악단이 테이블을 돌며 노래를 불러줍니다. 생일 축하 테이블은 왜 그리 많은지, 이틀 후가 그의 생일이지만 말하기가 쑥스럽습니다. 영국인의 하인처럼 말쑥하고 검박한 지배인이 다가와 휴가중이냐고 묻습니다. 그가 결혼 기념일 여행을 하고있다고 답합니다. 얼마 후 악단이 다가와 우리를 둘러싸고 한국 노래를 불러줍니다. 아마 예전엔 한국 관광객이 흔해서 배워두었던 노래인가 봅니다. '사랑해'를 거의 틀리지 않게 잘 불러 넘깁니다. 나는 '하와이안 웨딩 쏭'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쉽사리 한 곡 더 불러 줍니다. 후렴에 함께 화음을 넣으며 그의 손을 잡고 얼굴을 바라보니 그는 벌개져서 당황해합니다.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돌아오자 그는 어쩔 줄 몰라 서성거립니다. 도무지 마음이 둥둥 떠서 진정이 안 된다고 합니다. 생애 최고로 행복한 날이라는군요. 내가 그런 사람들과 맞추어 노래할 줄은 몰랐다는군요. 드디어 아들들에게 전화로 쏟아 논 후에야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뽀송뽀송한 하얀 린넨 시트 속에서 잠이 듭니다. 창 밖에는 아직도 검은 비가 내립니다. 행복감과 알 수 없는 슬픔이 뒤섞인 기분으로 별사과(honey star apple)를 안주 삼아 홀로 깨어서 맥주를 마십니다. 마지막 밤의 어두움이 가슴을 분탕 칠하며 회오리를 일으킵니다. 말레이시아를 개혁한 마히티를 총리가 주장했던 <아시아적 가치>를 패러디해서 소위 <여성적 가치>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봅니다.


세상의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권유하는 전투적 여성상의 표본이 되어 살아온 듯한 지난 시간에 회한이 사무칩니다. 일면 한국의 宗婦들이 지닌 확신과 능력에 찬 삶을 담담히 지키는 것만으로는 모두가 아닌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가장 여성다운 것이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것이다.>고 가르치면서도 여성다움에 대한 정의를 강하고 아름다운 것, 범접할 수 없는 것에 기준한 것은 아니었던지. 각 나라 여인들이 저마다 지키고있는 유순함과 섬세한 감성, 친절한 배려의 마음과 자세가 몹시도 부러워지는 것입니다.


아침에도 여전히 뿌리는 빗속을 걸어 250미터 높이의 타워에 올랐습니다. 58초만에 도착하는 고속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니 현기증 나는 시야가 펼쳐집니다. 재료와 디자인과 용도가 다양한 갖가지 건축물의 전시장을 내려다보는 듯 합니다. 사이사이 우거진 숲과 어울려서 쿠알라 룸프르의 자랑인 쌍둥이 건물의 전경도 보입니다. 동굴 관광이나 트윈 브릿지(쌍둥이 건물 중 하나는 일본이, 두 번째 것은 한국인의 건축물인데 그곳에서 한정적으로 관람시키는 코스)를 단념하고 전통 바틱 전시장과 KL국립 박물관을 구경했습니다. 여러 나라들의 혼합된 문화가 참으로 흥미로운 곳이었습니다.


의기소침해진 내 기분을 위해 남은 시간을 쇼핑에 보내자고 수리아 백화점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가 관심 있는 것들을 살펴보는 동안 기껏 화장품 코너를 돌아보지만 아무 것도 사고싶지 않습니다. 작년 2000년 기념으로 출시한 에스테 라우더의 용무늬 디자인의 컴펙을 만지작거렸더니 선뜻 사줍니다. 너무 비싸다고 말렸지만 딱 하나 기념인데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언제나 폭넓은 그를 당하지 못합니다.


윗층에 있는 각종 음식을 파는 싸구려 식당에서 인도풍의 볶음 국수로 마지막 식사를 했습니다. 보기엔 지저분해 보였지만 참 맛있었습니다. 온갖 인종의 전시장 같은 나라, 여러 종교적 자세로 기도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한 남자와 두 여인이 대 여섯의 아이들을 이끌고 식사하고 있습니다. 달랑 두 사람인 것보다 셋이서 받치고 있는 가정이 더 튼튼해 보이는 것은 아마 그들의 얼굴에 어떤 갈등의 모습도 보이지 않아서일까요? 사람의 인식은 때로 종교나 환경에 의해서 가변적인 것 아닐까요. 아름다운 가족이었습니다.


        '01.01.31

        다시 겨울 속으로 돌아오며 푸른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