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샘
梨花雨 흩날릴 적에...
04/17
梨花雨 흩날릴 적에...
梨花雨 흩날릴 적에 울며 잡고 이별한 님 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도다.
부안 명기 梅窓은 그 미모보다는 재기와 절개로 이름을 남겨, 최근 이 詩碑가 있는 곳 부안에 자기 이름의 공원을 갖게 되었다합니다. 최경업 장군이나 천민 유누구와 나눈 사랑이 기록에 남아있고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과는 평생 우정을 쌓았다고 하니, 그 너르고 당당한 교분이나 여류 시인으로서의 풍류는 요즘에도 희귀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내가 작년에 그녀의 존재를 유심히 알게 된 것은 初章이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하고 외우던 시조의 전문과 저자를 알고자 이곳저곳을 뒤적이던 중이었습니다. 그 시는 아직도 찾지 못하였지만 대신 알게 된 것이 매창, 李桂生입니다.
梅窓이란 본디 한 그루 매화나무를 창밖에 심어두고 임을 보듯 바라보는 그 창을 이른다지요. 당시로선 님에게 보내는 애틋하고 청정한 마음은 단 한 가지의 매화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나 더듬어 봅니다.
입이 작은 아담한 백자 梅甁에 홍매화 두어 송이 핀 가지 하나 꽂아두고, 이 봄에 매화 가지를 보내 준 여인을 사모하며, 조용히 책을 읽는 것도 군자의 풍류가 아니었을까요. 매화 향기 그윽한 그녀의 체취에 연달라 떠오르는 것은 봄비에 흩날리는 배꽃의 정취입니다.
나는 어느 해 봄밤, 배꽃 가득한 농원 주변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휘엉한 보름 달빛 아래 나지막이 널어진 처절하도록 희디흰 배꽃들은... 무명옷 즐겨 입던 어머니의 모습으로 심상에 아프도록 깊게 刻印되었습니다. 삶의 한 모티브는 또 그렇게 시작되는 것일까요.
가을이면 그 농원에 가서 황금색으로 곱게 익은 배를 삽니다. 가장 수분이 많고 돌세포가 사각거리는 농익은 것을 사다가 시원하게 저장해두고, 잔기침 약으로 쓰거나 귀한 손을 접대하는 마음으로 깎아냅니다. 마침 친구의 아버지 되시는 詩人 안효순님은 '梨花의 꿈'이라는 시를 새긴 접시를 주셨습니다. 나는 꼭 배를 내는 접시로만 그걸 사용합니다.
<梨花의 꿈>
눈이 내리면 꽃이 피는 연습을 쌓고 쌓아 봄이 오는 날 세상이 환하게 배꽃을 피워야지
어제도 내 어머니의 친정, 금천 부근을 지나며 그렇게 피어있는 배꽃들을 보았습니다. 포도밭이 유명한 효천역 지나서 공동묘지가 늘비한 산아래 가볍게 경사진 야산 등성이에 일구어진 배밭, 회초리같이 뻗은 어린 새 가지에도 촘촘히 달린 꽃들의 아우성이 저물녁 검기우는 하늘을 배경으로 눈부시게 다가왔습니다.
매화를 필두로 개나리, 목련. 진달래, 벚꽃, 영산홍, 복숭아, 살구꽃들이 죄다 잎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조급증을 과시하는데 유난히 梨花만 보름밤을 기다려 필까요? 잘 정돈된 농원의 받침대를 따라 큰 가지에서 막 돋아난 새 가지들은 촛대처럼 하늘을 향해 일제히 치솟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축제의 일곱 촛대처럼 무리 지어 꽃가지가 되어있는 것을 보며 슬픔보다 환희를, 그리움보다는 기쁨을 느꼈답니다. 아마도 슬픔도 그리움도 다하는 날이 있어서 끝에는 이렇게 찬란한 기쁨과 환희로 되감기도 하나봅니다.
하지만 다시 또 기다리는 것은 다음에 오는 어느 해 봄, 밝은 보름 달빛 아래 눈가루 뿌린 듯 처연한 그 흰빛을 가슴 시리게 안으며 순결한 처녀의 봄을 다시 갖고싶은 환상입니다.
'01.4.17
배꽃 날리는 곳에서 푸른샘 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