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샘
꽃비를 맞으며...
04/16
꽃비를 맞으며...
새하얀 꽃구름 그늘을 따라... 夢遊의 포근한 팔 아래로 부는 훈풍에 취해 걸었습니다. 절정에 달한 꽃들은 목화뭉치 너울처럼 가볍게 날아올라 먼 허공에 걸려있었습니다. 어제 밤 잠시 내린 비에 젖어버린 滿開花는 고운 꽃잎을 낱장으로 흩날리며 벌써 눈발처럼 분분히 지고 있습니다.
아, 짧은 봄을 탓하여 무엇하리... 봄은 빵빵한 청춘들이 무수히 발하는 고음의 탄성따라 분수처럼 뿌려지는 빛의 산란으로 아둔한 뇌를 현기증 나게 흔듭니다. 곳곳에서 내지르는 화사한 웃음소리에 움찔움찔 놀라서, 우수수 쏟아지는 꽃비를 맞으며 한참을 눈부신 길가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승달산에 안긴 이웃 대학 캠퍼스는 늦은 봄을 맞도록 칼바람을 내불더니, 순식간에 뽀얀 벚꽃 그늘과 실버들 낭창한 가지에 연두의 새순들을 갖추어 내어놓고 신나는 봄 잔치를 벌립니다. 그래서 속없이 열나 청강하는 화요일의 <독일 문학의 이해> 시간은 마치 자연 속으로 遠足가는 양의 부가가치까지 얻게되어 더욱 즐겁습니다.
수업이 끝난 후 내가 시간만 내면 강의하시는 선배 교수님과 교내 <마카오 레스토랑>에서 칼질을 하며 즐거운 보충 강의까지 들을 수도 있으니까요. 허지만 누구와 아무 이야기를 나누어 희석시키고싶지 않은 혼미하도록 향기로운 기분을 꼭 안고 혼자 꽃길 속을 달려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길 차창밖에 빠르게 스쳐 지나는 풍경 속에서도 피고 지는 개나리의 꽃과 잎의 교차를 보며, 봄보다 더 환상적인 계절은 없다고 굴복하게 됩니다. 천지에 가득한 봄빛은 생명의 부활이고 희망의 소생입니다. 그 무엇도 오는 봄을 되돌릴 수 없고 저 꽃들의 아름다움을 무참하게 할 수 없습니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봄은 연분홍의, 노랑의, 순백의 꽃들로 머리를 얹고 있습니다. 멀리 산의 우아한 곡선이 부드럽게 안아 올린 등성이 따라 곳곳이 복숭아꽃도 아련하게 피어있습니다. 문득 슬픔 한 자락 밀려옵니다.
내게 봄은 이제 먼 과거,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우물 같습니다. 라일락의 보랏빛 하늘이 드리운 석양이면 공작의 꼬리 깃털처럼 한껏 펼쳐졌던 봄은 어둠에 몸 섞으며 물 같은 밤 속으로 천천히 흘러들어 갑니다. 그 빛과 그 향도 어둠 속에서는 조용히 잦아드는 낮은 외마디 소리에 불과합니다.
자수정 같은 투명한 밤, 빛이 나누어 놓은 것을 어둠이 고르게 섞어줍니다. 어둠 속에선 모든 사물의 그림자들이 풍부하고 유연한 흔들림 속에 누워있습니다. 모든 욕망이 잠자는 물 같은 시간에 꾸는 꿈은 섬세하고 유려한 손가락으로 그대의 부재를 알립니다.
이제 막 아물기 시작하는 상처의 껍질을 다시 벗기고 너무 오랫동안 아프게 해서 이제는 감각의 일부가 되어버린 바로 그 통증을 도리어 그리워하듯 깊이 후벼내는 하얀 손을 봅니다. 내가 최초의 그대를 사랑했던가? 최후의 그대를 잊지 않을 수 있을까? 그대는 나 외의 모든 것보다 오래 내 곁에 남아있을 수 있는가? 덧없고 허망한 의문 속으로 나는 또 오래 서성입니다.
나무들도 고혹적인 짙은 어둠 속에서 삶의 정지된 순간을 소원하는 낮은 신음을 내며 방황하듯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여리디 여린 꽃들은 독한 밤의 어둠, 죽음과 망각을 견딜 수 없다 합니다.
저 강풍과 찬비 후, 또 하나의 찬란한 봄은 시들어버리고, 달콤한 버찌는 진득한 핏빛 과즙을 아스팔트 보도 위에 흘려놓겠지요. 그리고 初夏의 신록, 그 푸름 위로 찬연히 뿌려지는 빛과 향기는 더욱 벅찬 고뇌와 황홀한 이성으로 성장된, 우아한 처녀의 모습으로 기억 속에 아로새겨지겠지요.
'01.4.16
또 하나의 봄을 보내며 푸른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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