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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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핀 평사리 풍경
하동 평사리 <土地> 3
무, 배추를 심은 채마밭이
아슴아슴한 저녁 안개에 싸여 들어가고 있고,
부스스한 옷매무새의 김 서방 댁이
부엌을 들락거리며 부산을 떨고 있다.
닭장에 들어갈 때가 되었는데 닭들은 배추잎을 쪼아 먹고 있었다.
땅바닥에 눈을 떨구고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당산 누각 앞에까지 올라간 구천이는
자신의 발부리를 오랫동안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다시 느릿한 보조로 누각에 올라 간 그는 난간을 짚으며 걸터앉는다.
달 뜨기를 기다리는가 ?
마을엔 아직 불빛이 보이지 않았고, 최 참판 댁 기둥귀에
내걸어 놓은 육각등이 뿌윰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달은 솟을 것이다.
낙엽이 날아 내린 별당 연못에,
박이 드러누운 부드러운 초가 지붕에,
하얀 가리마 같은 소나무 사이 오솔길에 달이 비칠 것이다.
지상의 삼라 만상은
그 청청한 천상의 여인을 환상하고 추적하고 포옹하려 하나,
온기를 잃은 석녀(石女), 달은 영원한 외로움이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검은 명부(冥府)의 길손이다.
구천이는 눈을 반쯤 감고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지난 정월 대보름날에는 당산에 달집을 지었었다.
"워어이이 ―― 달 나왔다아!"
아이들이 달을 향해 소리치면 강아지도 덩달아서 짖어 대었다.
저마다 한 가지씩 소망을 품었을 마을 사람들이
달집 둘레에 모여들면서 불을 질렀었다.
훨훨 타오르는 불길, 아낙들은 손을 모아 수없이 절을 했었다.
불빛을 받은 사내들 얼굴은 짙붉게 번들거렸으며,
눈은 숯덩이처럼 짙게 빛났었다.
순박하고 경건한 소망의 기원이 끝났을 때,
마을 사람들은 장날에 모여든 장꾼처럼 떠들기를 시작했었다.
사내들은 곰방대를 꺼내 들며, 아낙들은 코를 풀고
치맛자락을 걷어 불빛에 윤이 나는 콧등을 닦으며
새삼스럽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친지들의 소식을 물어 보고,
씨받은 암소 얘기며, 떡이 설어서 애를 먹었다는 얘기며,
노친네 수의(壽衣) 걱정이며, 이윽고 달집은 불길 속에 무너지고,
무너진 자리에서 불길마저 사그러지면은
끝없이 어디까지나 펼쳐진 은빛의 장막,
그 장막 속에서 노니는 그림자같이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갔던 것이다.
달이 떠오른다.
강이 굽이쳐 돌아간 산마루에서 달이 얼굴을 내비친다.
까맣게 찢겨진 나뭇잎들의 흔들리는 모양이
뚜렷해지고 밋밋한 나뭇가지는 잿빛, 아니 갈빛을 띠기 시작한다.
꽹과리, 징 소리가 먼 곳에서 흐느껴 울고,
강가에서 부르는 처녀 아이들의 노랫소리는 좀더 가깝게 들려온다.
달은 산마루에서 떨어져 나왔다.
아직은 붉지만 머지않아 창백해질 것이다.
희번덕이는 섬진강 저켠은 전라도 땅,
이켠은 경상도 땅, 너그럽게 그어진 능선은 확실한 윤곽을 드러낸다.
난간에 걸터앉아 달 뜨는 광경을 지켜 보는 구천이의 눈이
번득하고 빛을 낸다. 달빛이었는지 눈물이었는지,
아니면 참담한 소망이었는지 모른다.
....박경리의 장편소설 <土地>중에서....
평산리 마을 입구에 서니
멀리 황금 들녁 너머로 섬진강이 유유히 흐른다.
최참판댁 소작인들이 살던 마을의 소박한 길목마다
코스모스가 한창이고 박꽃이 초가지붕위에 피어
가을의 풍요로움과 정겨움을 더하는 것 같았다.
사연많은 물레방아간과 돌담너머에 살았던 사람들의
애닮고 아픈 사연들이 평온속에 배여났다.
하얀 메밀꽃이 만발한 채마밭과 휘어도는 흙길들,
<土地>에 묘사된 풍경들을 퍼즐 맞추듯 찾아들다
횅하니 비어버린 스산한 장터에 이르러서
주막에 들어 식혜 한잔 들이키며 마른 목을 축였다.
곧 해가 질 모양이다.
조금만 더 더디게 해가 지면 좋을텐데...
해가 지면 아예
만주에서 먼 길로 돌아온 길상이처럼
하룻밤 여기서 머물러 버릴까하는 고민에 들었으나
서희같은 女人이 없는 평사리의 밤은
너무 허전하고 외로울 것 같아
그저 아쉬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평사리 읍내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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