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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山寺)

봉황산 부석사

SHADHA 2005. 2. 24. 15:05


지난 여름의 旅行






봉황산 부석사

鳳凰山 浮石寺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조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1016년(고려 현종 7)에 원융국사가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중창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이듬해 조사당(祖師堂)을 재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개연을 거쳐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18),조사당(국보19),소조여래좌상(국보45)
조사당 벽화(국보 46),무량수전앞 석등(국보 17)등의 국보와
3층석탑,석조여래좌상,당간지주등의 보물,원융국사비,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 ,취현암 ,범종루 ,안양문 ,응향각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大石壇)이 있다.

경북 영풍군 부석면에 위치하고
국내에서 가장 오랜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이 있다

..자료글...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의하면,
의상이 20세 때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중국 등주에 머물 때이다.
당나라 군장의 딸인 善妙라는 아가씨가 의상을 몹시 사모하였다.
그러나 철석 같은 의상의 마음을 붙들지 못한 선묘는 자신도 부처님의
불제자가 되어 의상을 항상 모실 수 있도록 기원하였다.
의상이 유학을 마친 뒤 배를 타고 신라로 떠나자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한 마리의 큰 용이 되었다.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여 무사히 본국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의상이 이곳 봉황산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먼저 이곳에 자리잡고 있던 도적들이 방해를 하는 것을 보고
조화를 부려 큰 돌을 세 번이나 공중에 뜨게 하였다.
이에 도적의 무리가 혼비백산하여 모두 흩어지니
선묘는 석룡石龍이 되어 이곳에 눕고 그 위에 절을 짓도록 하였다.
의상은 선묘가 변한 큰 바위 위에 절을 창건하고
'뜬 돌' 위에 절을 지었다는 뜻에서
부석사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경내의 아미타불 바로 밑 부분이 석룡의 머리 부분이며
석등 아래쪽이 석룡의 꼬리 부분이라고 한다.
또 이곳에는
선묘의 공덕을 기리는 선묘각과 선묘정이라는 우물이 남아 있으며,
의상조사가 처마 안에 지팡이를 심고서
"내가 떠난 후 이 지팡이에서 가지와 잎이 반드시 돋아날 것이다.
이 나무가 발라 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은 줄 알라."
라고 한 비선화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조사가 떠난 후
가지와 잎이 돋아나더니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
천년이 넘었는데도 한길 남짓하여 변함없이 살아 있다고 한다.
조선 광해군 때 경상감사가
'신선이 짚던 지팡이나무이니 나도 지팡이를 만들겠다'고
톱으로 잘라 갔다고 하는데,
그는 얼마 후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그후 나무에서 다시 두 줄기의 가지가 돋아 늘푸르므로
비선화飛仙花라 부른다고 한다.

...자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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