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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84 멧 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대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84 멧 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대

SHADHA 2004. 2. 12. 21:12


푸른샘




멧 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대...

04/20








멧 버들 가려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대...

멀리 있는 그리운 이여...
나는 지금, 이따금 홀로 거닐던 바닷가로 나와서 부드럽고 상큼한 갯내음 속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도시락을 싸듯 갖가지 정성들인 반찬으로 이 글을 쓰고싶습니다. 아름답고 따뜻하게, 그리고 슬프도록 맛있게...


이곳 바닷물은 차가 다니는 도로 가까이 바짝 다가와 찰랑거리는 탓에 무심히 수평선을 응시하다보면 발 밑이 흔들리며 거대한 유람선을 타고 떠가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게 됩니다. 요즘 들어 수시로 느끼는 이 몽환의 증세는 저 나지막한 야산 위의 연분홍 솜사탕 뭉치같은 한 그루 복숭아꽃나무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늘 첫새벽에도 홀로 차를 타고 나가 무논 넓게 펼쳐진 들판을 지났습니다. 노면보다 낮게 주저앉은 논에는 이제 곧 모낼 준비로 일찌감치 넉넉히 물을 잡아 가두고 있었지요. 거기서 내가 본 것은 산허리 낮게 두른 명주 목도리처럼 뽀얗게 자욱한 물안개... 지면 위로 살풋 떠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외지고 한적한 길을 홀로 질주하며 밤새 증발된 물방울들이 만나고 흩어지는, 그 깊고 고즈넉한 물안개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지요. 땅은 한없는 고요와 청정함으로 팔을 벌리고 그 빛도 어둠도 아닌 무채색의 공간은 잃어버린 한 영혼의 윤회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았지요.


나는 바로 기록하지 않으면 곧 정신의 혼미 속으로 사라질 그 느낌을 부여잡고 망막 깊숙이 새겨지도록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습니다. 검은 흙덩이는 트렉터 아래서 곱게 갈리고 뒤섞여 새 것이 되어 있었지만, 이제 낡고 남루한 내 마음을 갈아줄 쟁기나 보습을 흠모하기에 이토록 바다나 들판을 두루 헤매는 것일까요?


산수의 풍광이 아름다울수록 초라해지는 정신의 품격과 도량을 아쉬워하면서도 소슬한 바람 휘모는 곳에 마음을 펴서 널어두었습니다. 태양과 비바람에 부식되고 풍화하는 바위처럼 내 몸 속 수억의 세포들도 수조의 미립자가 되어 종말에는 지표에 산산이 흩어지겠지요.


이곳 바닷가에도 해안도로를 따라 어린 벚나무 가로수들이 심겨져 있습니다. 거칠 것도 숨길 것도 없다는 듯 이름 봄부터 조급하게 생 가지를 찢고 꽃부터 토해내더니, 그토록 맑고 밝고 화사하게 하늘로 날아오르듯 가볍게 꽃을 피워서 완벽한 알몸으로 떨고 있더니, 이제는 살 찬 갯바람에 진분분 난분분 지고 있습니다.


그토록 애잔하게 담백했던 흰빛은 잎 순이 내밀자마자 탁해지고 흐려졌습니다. 그토록 향기롭던 꽃술도 미련 없이 흩어져 낮은 곳으로 떨어져 구릅니다. 일시에 신록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꽃들의 도량이 그리 화끈할 진데 내 어찌 봄이 짧다고 一喜一悲하겠습니까.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슬퍼하던 시인을 도리어 위로하렵니다.


그리운 이여. 연두 잎새 돋아난 꽃가지 하나 꺾어 보냅니다. 꽃이 필 때 세상이 열리고 꽃이 질 때 꿈은 닫겼습니다. 그러나 물안개 흐르는 곳에 떠돌던 호흡, 황금빛 꽃가루 흩뿌리던 입술, 저는 다리 맞잡아 주던 지극한 온기, 모닥불빛 속에 타오르던 그 정직한 모습은 신록처럼 푸르르게 찾아와 새로운 기대와 신비를 회복합니다.


바다는 연안의 섬들로 둘러싸여 호수처럼 잔잔하게 누워있습니다. 갓바위 아래 묶여있는 작은 고깃배 한 척, 산형 노송 한 그루... 멀리 높이 나는 바닷새, 갈매기의 하얀 날개를 타고 내 그리운 이름 하나 떠납니다. 내 이제 기다림은 봄도 아니고 꽃도 아니며 사랑도 아니리라. 물처럼 말간 그대 심상에 어리는 푸른 버들가지 빗질하며... 단지 기다림이리라.


밤비 내린 후면 연두의 신록들은 환희 속에 더 푸르러집니다. 가지 끝에 매달린 물방울들은 어느덧 내 뼈에 스며들고 내 살에 파고들어 푸르게 피돌기를 일으킵니다. 어린 벚나무 아래에 망연히 기대서니 내 팔에는 새순이 돋고, 내 발등에 잔디가 덮이는 환영이 보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린 가슴 다시 여미며 저 진한 망각의 잠 속에 서 보려고 묵묵히 돌아갑니다.


'01.4.19

연두빛 나날을 기다리며 푸른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