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샘
바다는 황량하고 쓸쓸하여라...
04/23
바다는 황량하고 쓸쓸하여라... (T. S. Eliot 의 '황무지'에서)
봄 바다를 보러 나갔습니다. 목적지도 없이 달리다가 만나는 아무 바다나 보기로 하였습니다. 멀리 혹은 가까이 바다는 모두 비슷합니다. 옥색 지붕을 가진 지구의 표면 - 한 장의 파노라마입니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바닷가의 모습, 포구의 번잡함 혹은 황량함이 각기 다를 뿐입니다.
함평灣의 달머리(月頭)는 연안에서부터 돌출된 언덕이 소나무 무성한 앞섬까지 연결되는 특이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추 보면 모세의 기적을 연상시키는 육지와 섬의 연결 통로와 같습니다. 섬은 바위와 소나무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썰물이 떠난 후 남긴 웅덩이에 유일하게 다슬기 몇 마리 살고 있습니다.
비를 휘몰아오는 듯 불어오는 바닷가 강풍은 밀려드는 밀물을 더욱 거칠게 몰아 부쳐서 마치 백마를 탄 기병들의 상륙 작전을 보는 듯 합니다. 잇닿은 모래 언덕의 좌측에서 몰려오는 파도는 거칠기 짝이 없지만, 오른쪽에 있는 바다는 만에 갇혀서 잔잔한 호수 같습니다.
바람이 마음대로 옷깃을 날리게 두고, 모자를 벗어 조개 껍질을 주어 담았습니다. 물살에 몹시 부대낀 조가비는 이제 순백의 쌀로 빚은 정갈한 송편 같습니다. 뒤돌아다보니 젖은 모래밭에 남겨진 발자국이 아무렇게나 삐툴삐툴합니다.
바닷가 집들의 정원은 모래사장을 한껏 들여놓고 되는대로 심어놓은 자목련, 영산홍, 겹 벚꽃, 홍 철쭉, 그리고도 유채나 흩뿌려진 노란 장다리꽃으로 화려하기 짝이 없습니다. 빨랫줄에 널린 물질할 때 입는 작업복 사이로 깨끗한 아기 기저귀가 나부낍니다.
들판엔 쪽파를 뽑아 씨를 받기 위해 말리는 작업이 한창입니다. 고추를 심을 터널을 만들거나 담배 모종을 뾰족이 키워놓고 양수기를 이용한 스프레이식 쿨러로 물 뿌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제 밑이 들어 영글어 가는 양파나 마늘에도 물을 흠뻑 뿌려줍니다.
진초록의 보리밭에선 노고지리가 하늘을 향해 찌르듯이 날아오르고, 바로 곁의 갯벌에는 하얀 두루미가 외다리 꼬고 서서 먹이를 찾고 있습니다. 육지와 바다가 하나로 혼합된 듯한 이곳은 연두 빛 물색과 먼 수평선의 하늘까지도 이미 희미한 안개로 채워져 틈새를 잃고 말았습니다.
나무로 깎은 나룻배 한 척 기울어져 박힌 모래사장을 작고 검은 물새가 종종거리며 뛰어가다가 돌아다보며 어쩔 줄 몰라합니다. 아무래도 친구를 잃은 모양입니다. 혼자 놀기엔 너무 어린 새의 걸음이 아무래도 뒤뚱거려 보입니다.
숭어회를 먹기 위해 낚시꾼들 모이는 꽃섬 가는 쪽 작은 선착장을 찾았습니다. 연안에 두고 간 자동차들만 수십 대인데 돌아오는 배는 하나도 안 보입니다. 아마도 바람이 심해서 보리숭어조차도 드문 모양입니다. 톱머리 해수욕장 지나서 홀통 유원지, 바닷바람 속에 풍력을 이용한 자가발전의 풍차가 돌아갑니다.
조금나루는 신공항 건설의 새 활주로를 지나서 툭 트인 곳, 모래와 갯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바다를 양 갈래로 나누는 방파제가 한 가운데 가르마를 타듯이 놓여있고 멀리 물 빠진 뻘은 광활한 사막과 같습니다. 일몰의 시간이 되면 노송 사이로 불타는 노을의 꿈을 꾸게 됩니다. 빛의 중심, 침묵과 마주하고서...
음악을 바꾸었습니다 생선회 칼로 저미는 듯 썰어대던 바이얼린곡을 뽑아내며 통증을 버리듯 부드럽고 따스한 입술, 향기로운 입김이 부는 풀루트의 곡으로 바꾸어 끼웁니다. 음악은 안개처럼 아련합니다. 비제의 <진주조개잡이>에서 발췌한 로망스 선율이 아름답게 젖어듭니다.
그래서... 그래도... 엘리어트의 詩처럼 바다는 황량하고 쓸쓸합니다...
'01.4.21 바닷가를 헤매이며 푸른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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